서울의 한 건축 자재 회사에 다니는 A(29)씨는 지난달 만30세 이상 예비군·민방위 동료들의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지켜보기만 했다. 잔여 백신 접종 기회를 고민하던 A씨에게도 지난달 기회가 왔다. 미국으로 해외 출장 일정이 잡힌 것이다. 그는 "출장 가기 전 회사와 미리 백신 접종에 대해 상의하고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종합 약국 체인 CVS에서 예약하고 화이자 백신을 맞았다"고 말했다.
A씨와 동행한 동료 B(31)씨도 3개월간 미국 출장을 떠나 현지에서 화이자 백신을 맞았다. 그는 "출장으로 미국 가서 화이자를 맞을 수 있어 국내에서 얀센 접종을 굳이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출장·여행 겸 백신 접종…'일석이조' 백신 원정
정부의 백신 접종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는 가운데 이들처럼 미국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간 김에 백신 접종까지 마치고 오는 '일석이조' 백신 원정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도 "출장이 잦은 건설업계 종사자로 코로나19 감염 위험에 불안했는데 괌 출장 중 백신을 접종했다"라거나 "고1·중2 자녀의 여름방학을 맞아 LA로 백신 여행을 다녀왔다"는 후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행사들도 이런 수요를 겨냥해 '백신 관광' 패키지 상품을 내놓고 있다. 미주 전문 여행사 힐링베케이션은 지난 23일 관광을 하며 화이자·얀센 등 백신을 선택해 맞을 수 있는 상품을 출시했다. 여행 기간은 두 번 접종이 필요한 화이자는 25박 27일, 한 번 접종하는 얀센은 9박 12일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현지 가족이나 지인을 만나러 간 김에 백신을 맞으려는 4050 고객의 문의가 하루에 20건 정도 들어온다"고 밝혔다. 백신 여행 상품을 출시한 뉴욕여행 전문 여행사 앳홈트립 관계자는 "한국에서 백신을 기다리다 접종이 지연돼 여행과 백신 접종을 같이 하려는 부부, 가족 단위 고객들이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백신 수급 차질…"백신 원정에 영향" 분석도
정부의 백신 공급 계획에 따르면 예비군·민방위를 제외한 만18세 이상~49세 미만의 경우 가장 늦은 순위권으로 8월 중순 이후로 예약일정이 잡혀있다. 선착순 예약에 실패할 경우 실제 접종 시기는 9월 말 이후로 밀릴 가능성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국내 백신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배경이 '백신 원정'에 영향을 줬다고 분석한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정부의 백신 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접종 계획이 지연돼 50세 미만 국민은 기약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일부 개인이 자구책으로 위험을 부담하는 '백신 엑소더스'가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희 용인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는 "백신 수습 불신이 큰 원인으로 백신 여행 상품은 국내 백신 접종 방식처럼 별도 예약 없이 관광객에도 무료 접종이 가능하고 종류 선택도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일부 해외 백신 접종자 사이에선 국내 귀국 후 2주 자가격리를 면제해달라는 목소리도 있다. 방역 당국 지침에 따라 관광 등 비필수 목적의 해외 접종자의 경우 국내에서 자가 격리가 면제되거나 사적 모임 등 인원 제한 제외 같은 '백신 인센티브'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해외 백신 접종자들에게 자가격리를 면제해달라"는 청와대 청원글도 계속 올라오고 있다.
美 주변국, 일본도 '백신 원정' 떠나
해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 5월 미국이 외국인 대상 코로나19 백신 무료접종을 발표한 이후 멕시코와 캐나다 등 일부 주변 국가 국민이 미국으로 백신 원정을 떠났다. 일본 도쿄 등지의 일부 여행사들은 지난 5월부터 백신 접종 여행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지난달 NHK는 뉴욕 중심부의 접종장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많은 이들이 백신을 맞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