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판지 침대 쓰고있다" 그가 본 '성관계 금지' 조롱의 진실

중앙일보

입력 2021.07.26 17:34

업데이트 2021.07.26 18:02

뉴질랜드 대표팀 공식 SNS에 올라온 골판지 침대 영상 캡처본. 조정 대표 숀 커크햄이 앉자 가운데가 푹 꺼진 모습이 담겼다. 인스타그램 캡처

뉴질랜드 대표팀 공식 SNS에 올라온 골판지 침대 영상 캡처본. 조정 대표 숀 커크햄이 앉자 가운데가 푹 꺼진 모습이 담겼다. 인스타그램 캡처

"소변이라도 본다면 젖어서 침대가 주저앉겠다. 결승전 전날 밤이면 최악일 것…."(미국 육상 선수 폴 첼리모)

도쿄올림픽 최대 화제 중 하나는 '골판지 침대'였다. 선수촌 방마다 설치된 이 침대를 두고 개막 전부터 선수들의 경험담이 올라왔다. 앉은 직후 침대 가운데가 푹 꺼지는 영상, 직접 매트리스를 해체하는 영상 등이 주목을 받았다. 대부분은 내구성이 떨어지고 불편하다는 불평이었다. 주최 측은 재활용 잘 되는 친환경 제품을 썼다고 해명했지만, "성관계 금지용"(뉴욕타임스)이란 표현까지 나왔다.

또 다른 의미로 올림픽의 주인공이 된 골판지 침대. 진짜로 잘 무너지고 불편할까. 25일 국내 종이 가구 제작 업체인 '페이퍼팝'의 박대희(35) 대표에게 논란의 진실을 물어봤다. 그는 집에서도 골판지 침대를 쓴다고 했다.

지난 25일 박대희 페이퍼팝 대표가 경기 하남 공장에서 AP 골판지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편광현 기자

지난 25일 박대희 페이퍼팝 대표가 경기 하남 공장에서 AP 골판지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편광현 기자

오해① 뉴질랜드 조정 선수가 앉자 무너졌다?
"가장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골판지 침대가 약하다'는 것이다. 종이 가구를 만들 때 쓰는 골판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택배 상자용 저품질 골판지가 아니다. 신문지 등 재생 용지가 섞이지 않은 'AP'(All Pulp) 골판지를 사용한다. 이는 일반 골판지보다 3배 튼튼하다. 가격도 4배에 달한다. 싱글 침대 기준으로 300㎏은 거뜬히 버틴다. 도쿄 올림픽에서 무너진 침대는 아치형의 약한 부분만 의도적으로 눌러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오해② 골판지 썼는데 200만원은 너무 비싸다?
"조립 인건비와 매트리스 가격 등이 포함돼서 그럴 것이다. 종이 침대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해당 비용은 올림픽 준비 중 인건비로 처리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매트리스도 일반적인 매트리스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올림픽 선수촌 골판지 침대를 제작한 에어위브는 일본의 프리미엄 매트리스 제조회사) 한국에선 10만원 안 되는 가격으로 300㎏ 버티는 침대 프레임을 만든다. 해외 제품도 15만~100만 원 선이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 '강한' AP 골판지 자체가 조금 비싸기도 하다." 
국내 업체가 골판지로 만든 침대프레임 '보리'. 가격은 10만원 이하다. 자료 페이퍼팝

국내 업체가 골판지로 만든 침대프레임 '보리'. 가격은 10만원 이하다. 자료 페이퍼팝

오해③ 물에 젖으면 금방 무너진다?
"침대용 골판지는 발수 코팅 과정을 거친다. 생각만큼 물이 쉽게 스며들지 않는다. 택배 박스용 골판지의 방수율이 40%라고 치자. 그러면 종이 가구용 골판지는 방수율이 95% 정도로 훨씬 높다. 침대가 완전히 침수되지 않는 이상 젖어서 무너질 일은 없다고 본다."
도쿄 올림픽용 골판지 침대, 왜 조롱받았을까
"투박한 디자인 탓이었던 것 같다. 그 침대 자체는 유엔이 정한 '지속가능한 발전 기준'에 잘 맞게 만들어졌다. 또한 친환경을 생각해 이런 종이 가구를 선택한 건 아주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침대 외관이 약해 보이고, 미적으로도 세련돼 보이지 않는다. 장인 정신이 투철해 디자인은 고고하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밀고 가는 일본 업체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해프닝 같다."

"가구를 1~2년만 쓴다? 종이 가구 괜찮아"

박 대표는 2010년 동일본 대지진 보호소에서 처음 종이 침대를 알게 된 후 '종이 가구' 제작을 시작했다. 2017년 친환경 스타트업 '페이퍼팝'으로 이름을 바꿔 규모를 키웠다. 지금은 직원 13명이 종이로 된 침대 프레임과 책상, 의자, 칸막이 등을 만든다.

경기 하남에 위치한 페이퍼팝 제조공장 내부. 공장 안이 종이로 가득 하다. 편광현 기자

경기 하남에 위치한 페이퍼팝 제조공장 내부. 공장 안이 종이로 가득 하다. 편광현 기자

종이 가구의 주요 고객은 금방 이사를 떠날 1인 가구, 대형 행사를 앞둔 기업 등이다. 박 대표는 "환경을 생각했을 땐 좋은 가구를 사서 20년 이상 쓰는 게 가장 좋다"면서도 "왁스 칠이나 코팅된 고급 가구는 재활용률이 아주 낮아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1~2년만 쓸 침대라면, 100년 동안 안 썩는 가구보다 종이 침대가 훨씬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우리에겐 생소, 해외선 유명 업체도 제작

종이 가구는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해외에선 그리 드물지 않다. 최초의 종이 가구로는 1970년대 미국 유명 건축가 프랭크 엣지가 만든 '골판지 의자'가 꼽힌다. 1990년대엔 일본 건축가이자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시게루 반이 종이 가구를 제작했다. 2010년대에는 '강한 종이'를 가공하는 기술이 개발돼 일본·유럽을 중심으로 업체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글로벌 가구업체인 스웨덴 이케아, 일본 무지 등도 종이로 만든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일반 골판지와 종이가구용 골판지 방수테스트 모습. 자료 박대희 대표

일반 골판지와 종이가구용 골판지 방수테스트 모습. 자료 박대희 대표

국내 전문가가 봤을 때 올림픽에 골판지 침대가 등장한 건 신선한 충격이다. 박 대표는 "올림픽 같은 일시적인 이벤트에서 종이 침대를 사용한 건 친환경적으로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며 "종이 침대가 목재나 철제 가구보다 품질적으로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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