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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들이 한땀한땀…시공 초월한 공예는 삶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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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호 18면

과거·현대 공예 한자리에

16일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옛 풍문여고를 리모델링 했는데 전시1동 3층은 층고를 확 높였다.

16일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옛 풍문여고를 리모델링 했는데 전시1동 3층은 층고를 확 높였다.

세종이 아들 영응대군의 집을 지었던 곳, 고종이 순종의 혼례 절차를 위해 건립한 ‘안동별궁(안국동별궁)’이 있었던 곳, 그 뒤 70여년간 여성 인재의 산실이었던 서울 안국동 옛 풍문여고가 16일 서울공예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서울시가 공예 문화 부흥을 위해 2017년 부지 매입을 완료한 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4년 만에 선보이는 귀한 공간이다. 기존 5개 동은 리모델링했고 박물관 안내동과 한옥을 새로 지어 총 7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누구나 들어와 무료로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단, 코로나19로 인해 당분간 관람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서울공예박물관 가보니 #유럽 명품 못잖은 자수·보자기 #고려말 ‘사계 분경도’ 작품도 #22개 종목 공예 장인 코너 눈길 #체험 공간서 옷 등 만들어볼 수도

모든 전시장이 이어져 있는 이곳은 ‘공예는 곧 삶이다’라는 화두가 관통하는 공간이다. 안내 데스크와 테이블, 실내·외에 설치된 의자부터 아홉 명의 작가가 돌·나무·도자기·유리·대나무·합성수지로 각각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이상 ‘날개’ 속 미츠코시 백화점 상품도

유리 작가 김준용의 ‘석양의 눈물’(2014).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유리 작가 김준용의 ‘석양의 눈물’(2014).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개관을 기념하는 전시는 8개다. 안내동에서 가까운 전시3동에서는 한국자수박물관 허동화(1926~2018)·박영숙(89) 선생 부부가 기증한 컬렉션 7000여 점 중에서 고르고 추린 작품을 중심으로 ‘자수, 꽃이 피다’와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가 2개 층에 걸쳐 펼쳐진다. “수집에는 사람을 순수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사회나 국가, 더 거창하게는 인류에 공헌하고자 하는 큰마음으로 이어지게 만든다”는 허동화 선생의 지론이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자수 보자기든 날염 보자기든 조각보든 그 색상이나 자태가 유럽 명품 브랜드 못지않다.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 양기훈의 그림을 본으로 삼아 기러기 53마리를 수놓은 자수 노안도 병풍은 여러 색실과 기법을 사용한 것이 돋보이는데, 어떤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전시됐는지 박물관 유튜브를 통해 알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오래된 국내 자수 유물로 추정되는 고려말 ‘사계 분경도’(보물 제653호)의 실물 앞에는 어떤 문양인지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촉각 관람 전시물’을 따로 비치해 시각장애인들의 이해를 도왔다.

국가민속 문화재 제41호 운봉수 향낭(향 주머니). 봉황·나비·박쥐를 수놓고 매듭을 달았다. 총 길이가 87.5㎝에 달하는 초대형이다.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국가민속 문화재 제41호 운봉수 향낭(향 주머니). 봉황·나비·박쥐를 수놓고 매듭을 달았다. 총 길이가 87.5㎝에 달하는 초대형이다.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3층 통로를 통해 전시1동 3층으로 넘어가면 갑자기 높은 천장과 널직하고 여유로운 흰색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 공예가들에 초점을 맞춘 ‘공예, 시간과 경계를 넘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유리·도자·나무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감각적인 기물을 만들고 있는 중견 작가들이 주인공이다. 국내 최초로 개인 유리 블로잉 스튜디오를 연 김준용, 일련번호가 새겨진 수많은 점토 조각을 일일이 붙여 도자를 완성하는 배세진, 나무의 물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주해 보여주는 박형철 등의 작가가 대표작을 선보인다.

2층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는 고대~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등 시대에 따라 공예품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보여주는 전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장인들이 재현한 고려 나전경함(螺鈿經函)이다. 조아라 서울공예박물관 주무관은 “고려시대 나전칠기 중 아름답기로 소문난 나전경함의 비밀을 밝혀보기 위해 김의용·손대현·정명채·박문열 등 각 분야 장인들이 의기투합해 목재로 뼈대를 만드는 백골짜기부터 자개 붙이기까지 전 과정을 재현했다”며 “최고 장인들의 손끝에서 나온 최고 작품이 주는 아우라를 꼭 느껴보시라”고 당부했다.

일제 강점기 공예의 발전에 주목한 ‘공예, 시대를 비추다’ 코너도 흥미로웠다. 자본가들이 공예품의 제작과 판매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산업 공예의 면모가 갖춰지기 시작했는데, 조선미술전람회 등 다양한 전시가 열리면서 공예가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된 시절이기도 하다. 미츠코시(三越) 백화점은 이상의 소설 ‘날개’와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도 등장하는 경성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으로 꼽혔던 곳인데(현 신세계 백화점 본점), 이 백화점 곳곳에 유명 장인들의 공예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투시도는 흥미로웠다. 역시 명성 높았던 조지야(丁子屋) 백화점(현 명동 롯데 영플라자관)이 VIP 고객 선물용으로 마련했던 동태 나전칠 구름용무늬 화병도 인상적이다. 김진갑(1900~1972) 선생의 작품으로, 공예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밖에 실제 학의 다리를 잘라 만들었다는 ‘조선 명산-학다리 젓가락’ 세트, 서당에 가는 도령 등 경성해시상회가 만든 조선풍속인형들도 독특했다.

‘귀걸이, 과거와 현재’ 등도 둘러볼 만

조선 선조의 후궁이자 인조의 할머니인 인빈 김씨에게 1755년 시호를 올릴 때 제작한 죽책. 옻칠한 대나무 조각 6개로 하나의 첩을 만들고, 그런 첩 10개를 엮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죽책 중 가장 크다.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조선 선조의 후궁이자 인조의 할머니인 인빈 김씨에게 1755년 시호를 올릴 때 제작한 죽책. 옻칠한 대나무 조각 6개로 하나의 첩을 만들고, 그런 첩 10개를 엮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죽책 중 가장 크다.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전시1동에서 전시2동으로 바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수많은 품목을 보느라 피곤해졌다면 잠시 밖으로 나가 4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앉아 쉬어가는 것도 좋다. 그 옆에 다양한 색상의 스트라이프 문양으로 장식한 원통형 교육동은 어린이박물관이다. 2개 층에 걸쳐 가구·철물·그릇·옷 공방으로 꾸며져 있는데,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전시2동 1층에서는 서울시 무형문화재들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손끝으로 이어가는 서울의 공예’가 이어진다. 총 53개 종목에 달하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중 우선 22개 종목의 공예 장인들 코너를 마련했다. 사진작가 구본창이 일일이 공방을 찾아다니며 찍었다는 장인들의 사진이 전시장 복도 양옆으로 깃발처럼 걸려 있어 엄숙한 느낌마저 준다. 악기장 김복곤이 만든 ‘공후’의 모습도 색달랐거니와 소목장(창호) 심용식의 공방에서는 직접 대패질을 해보고 편백나무의 질감과 향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귀걸이의 의미와 그 장식미를 탐구하는 ‘귀걸이, 과거와 현재를 꿰다’와 공예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언론인 고 예용해 선생이 쓰고 모은 자료를 정리한 ‘아임 프롬 코리아’도 둘러보길 권한다.

       도자 작가 배세진의 ‘고도를 기다리며’(2015).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도자 작가 배세진의 ‘고도를 기다리며’(2015).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밋밋하고 천편일률적인 전시를 탈피하겠다는 전 직원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관람이 지루하지 않다. 전시물 하나하나에 깃든 사연도 많아 하루에 다 볼 곳은 아니고 도서관을 가듯 자주 찾아야 하는 곳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출입 제한이 풀리면 교육동 옥상을 꼭 올라가 보아야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송현동 풍광이 시각적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 이른바 ‘이건희 뮤지엄’ 후보지 중 하나로 꼽힌 이곳은 수십 년간 접근이 금지됐던 ‘비밀의 정원’으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원시림이 있었네’라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주차장이 없다는 것은 매우 안타깝지만,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가 걸어서 1분 거리다.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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