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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옛 규제체제, 신기술에 맞춰 빠르게 개편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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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몇 년 전 벤처 관련 행사장에서 들었던 발표가 기억난다. 수학문제집에서 잘 안 풀리는 문제를 휴대폰 앱으로 찍어보내면 불과 몇 초안에 풀이과정과 답을 휴대폰으로 보내준다. 게다가 풀이를 보여준 문제와 유사한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심화학습을 이끌기도 한다.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휴대폰 사진 속의 문자와 수식을 자동으로 인식하고, 적절한 답을 골라 제시하는 이면의 인공지능 기술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인공지능, 세상 바꿀 범용기반기술 #투자에 인력 뽑았는데 효과 없다면 #전형적 ‘생산성 역설’ 나타난 것 #과거 방식과 프로세스 고집한 결과

이 기술로 가장 긴요하게 혜택을 보는 사람은 누굴까. 아마도 공부의욕은 있으나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고급 과외교사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소외 지역의 학생들일 것이다. 이런 서비스를 상시로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기존 학교 시스템과 선생님들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도 궁금해진다. 이 사례는 인공지능 기술이 교육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응용되면서, 인공지능 자체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나아가 사회의 기존 관행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매일같이 신기술이 쏟아지지만, 그 파급 효과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신기술 가운데, 모든 산업분야에서 활용되면서 각 도메인의 혁신을 촉진하고, 또 그 영향을 받아 핵심 기술이 다시 발전하는 선순환 관계가 있는 기술을 범용기반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 그리고 최근의 인공지능 기술 등이 범용기반기술의 대표적인 예다.

지난 5월 중국 톈진에서 열린 제5회 세계지능대회. 중국 정부는 2030 차세대 AI핵심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1위 AI 강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5월 중국 톈진에서 열린 제5회 세계지능대회. 중국 정부는 2030 차세대 AI핵심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1위 AI 강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범용기반기술이 등장하면 세상의 규칙이 바뀐다. 전기기술이 좋은 사례다. 20세기 초부터 전기가 본격 활용되면서 비로소 포드자동차의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대량생산체제가 가능해졌다. 대량생산된 자동차는 도시의 확대를 가져왔고, 연관해서 등장한 대량물류시스템과 쇼핑센터의 개념은 새로운 생활패턴을 만들어냈다. 그 와중에 중산층이 급속히 생겨났지만, 빈익빈 부익부의 소득 양극화도 심화되었고, 이에 대응해 연금제도 등 현대적 복지국가를 뒷받침하는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빅데이터 기술을 포함한 인공지능 기술이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이라는데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쓰이고, 각 분야의 혁신을 촉발하면서 인공지능 기술자체도 따라 발전하는 상승작용이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범용기반기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비자 행동과 생활방식, 고용과 교육, 사회적 관계의 변화까지 촉발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 글로벌 디지털세 논의에서 보듯 과거 물리적 국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국제통상의 규칙들마저 재정의되고 있을 정도다.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의 등장은 기업경영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모니터링해야하는 현상이다. 생소한 기업이 갑자기 산업의 리더가 되고, 만년 갈 것 같던 기업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창조적 파괴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게 일어나고, 조직구성과 인사관리 등 경영의 핵심개념들이 재정의되기 때문이다. 국가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산업구조의 급변과 일자리의 혼란은 사회갈등으로까지 연결되는데, 이에 적응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국가간 상대적 위상이 달라진다. 증기기관의 탄생과 함께 영국이 세계 리더로 올라섰고, 전기와 대량생산체제를 선도한 미국이 새로운 글로벌 리더로서 영국의 위치를 대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의 등장 후 한동안은 예외없이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솔로우가 1987년 주장한 것인데, 쉽게 말해,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을 채택했는데도 그 성과가 기대만큼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산성 역설은 20세기 초 전기기술의 도입 때도 나타났다. 전기기술은 1879년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하면서 산업계에 처음 소개되었고, 1893년 웨스팅하우스가 시카고 전력공급을 위한 범용시스템을 선보임으로써 기술적으로는 거의 완성되었다. 그러나 정작 전기를 채택한 공장들은 기대한 효과를 보지 못했고, 1919년까지도 미국 제조기업의 절반도 채택하지 않을 정도로 확산이 더뎠다.

전기기술 자체는 범인이 아니었다. 새로운 전기기술의 특성에 맞도록 조직과 업무프로세스를 혁신하지 못했고, 각 산업현장에 있는 기존 전문가들의 전기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것이 문제였다. 기존의 공장들은 한가운데 큰 증기기관을 놓고, 거기서 발생한 동력을 축과 벨트로 연결해서 썼다. 그러다 보니 큰 힘을 요구하는 공정을 가운데로 몰고, 2층, 3층까지 수직으로 연결하면서 동력손실을 최소화하도록 공장설계를 했다. 반면 전기모터는 어디나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적은 투자비로 넓은 단층공장을 지을 수 있고, 동력의 크기 순이 아니라 작업하는 순서에 따라 공정을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초창기에는 이러한 전기기술의 장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과거의 공장설계 방식과 업무프로세스를 고집했다. 기존 인력들은 신기술 채택에 소극적이거나 저항했다. 그 결과 전기도입으로 인한 효과를 거의 보지 못하거나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졌다. 전기의 개념이 탄생한 지 40년, 전기기술이 활용되기 시작한 지 무려 20년이 넘은 1920년대에 들어서야 전기로 인한 생산성 증가효과가 본격적으로 발휘되었고, 세상은 변곡점을 지나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전기기술이 소개됐지만, 미국의 주요 공장들은 증기기관을 설치해 놓고 여기서 발생한 동력을 축과 벨트로 연결해 사용했다.

20세기 초 전기기술이 소개됐지만, 미국의 주요 공장들은 증기기관을 설치해 놓고 여기서 발생한 동력을 축과 벨트로 연결해 사용했다.

솔로우가 컴퓨터의 생산성 역설을 이야기하던 1980년대 중반도 마찬가지다. 70년대 후반부터 기업들은 비싼 돈을 들여 컴퓨터를 설치하기 시작했지만, 일하는 방식은 여전히 연필과 종이를 사용하던 시대에 머물러 있었고, 생산성은 정체하거나 오히려 떨어졌다. 컴퓨터가 아니라 컴퓨터를 활용하는 사고방식이 문제였다. 단적으로 기업이 컴퓨터 살 돈의 9배 이상을 조직변화, 비즈니스 모델 재설계, 인력훈련에 투자해야 하고, 그것도 적어도 7년 이상 지속적으로 시행착오를 겪어야 비로소 효과가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또 한 번의 생산성 역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산업계에서 너도 나도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니 투자도 하고 전문인력도 뽑았는데, 아직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기업들이 많다. 기업이 인공지능 투자의 효과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나 고급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하는지는 문제의 본질이 전혀 아니다. 업무프로세스와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인공지능 시대에 맞게 재설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 전문가를 영입하는데 공을 들이는 것도 좋지만, 현장에 있는 기존 인력, 즉 도메인 인력의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나아가 도입 즉시 성과가 날 것이라는 기대로 한 방의 홈런성 프로젝트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안타를 쌓아가겠다는 스몰베팅(Small betting)의 정신으로 작은 인공지능 프로젝트의 경험을 꾸준히 축적하는 것이 핵심이다.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의 등장시기에 국가의 역할은 막중하다. 기술 혁신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생산성 역설을 빠르게 극복하는 국가가 새로운 기술 선도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 핵심 비결은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을 채택한 실험이 다양하고 많이, 그리고 빨리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기존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각종 규제체제를 신기술 친화적으로 빠르게 개편해야 한다. 또한 인공지능 전문가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교육벤처 기업의 사례처럼 각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도메인 전문가들을 많이 키우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다양한 응용사례가 많아져야 인공지능기술 자체도 발전할 수 있다.

공공부문이 인공지능의 테스트베드가 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다. 교육·보건의료·국방·치안·환경·행정서비스 등 인공지능으로 예산을 절감하거나 혁신적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차고 넘친다. 기술 선진국들의 인공지능 국가전략에서 정부 혁신을 첫째로 앞세우는 것도 공공부문이 인공지능 발전에 있어 중요하고 수준높은 응용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중국과 벌이는 기술패권 경쟁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범용기반기술 시대에 리더십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한 단면이다. 범용기반기술이 등장할 시기가 국가간 위상이 달라지는 기회의 창이라는 점은 우리 가슴을 뛰게 한다. 대한민국이 새로운 범용기반기술의 등장과 함께 진정한 기술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지는 ‘테스트베드 코리아’의 정신으로 생산성 역설을 얼마나 빨리 극복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