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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게임 세대의 인생 역전 방법은 다시 태어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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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회귀물’과 ‘환생물’ 웹소설 유행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포스터. [네이버 시리즈 캡처]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포스터. [네이버 시리즈 캡처]

‘내 남편과 결혼해줘.’ 제목부터 막장의 기운을 뿜어내는 이 웹소설은 요즘 네이버가 공들이는 웹소설 플랫폼에서 최고 인기작 중 하나다. 내용인즉 이렇다. 성실한 회사원인 주인공이 사내 결혼을 하는데, 남편은 주식투자에서 단 한 번 대박을 친 뒤 주식에 빠져 회사도 때려치우고 재산을 탕진한다. 주인공은 혼자 생계를 책임지면서 독박 가사에, 적반하장인 남편의 폭력에, 시월드까지 겪다가 스트레스로 암에 걸리고, 급기야 남편의 외도 현장까지 발견하는데 상대는 자신이 베프라고 여겼던 친구다. 주인공은 그들과의 몸싸움 와중에 어이없이 죽지만 곧 다시 깨어나는데 놀랍게도 10년 전 남편과 약혼하기 직전의 시절로 돌아와 있다. 주인공은 남편이 처음에 대박 쳤던 주식을 사서 야무지게 재테크를 하고 배신자 친구를 자기 대신 남편과 결혼시켜 둘을 함께 지옥에 빠뜨리기 위해 움직인다….

웹소설·웹툰의 대세인 회귀·환생 #게임 리셋에 익숙한 세대에 어필 #‘이번 생은 망했어’ 비관주의 내포 #와신상담 기간 없는 빠른 ‘사이다’

자신의 기억과 그간 축적한 능력을 간직한 채 과거로 돌아가서 복수를 하거나 인생을 바꾸는 것. 2010년대부터 웹소설에서 흔해진 설정으로 아예 ‘회귀물’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비슷한 장르로 ‘환생물’과 ‘빙의물’이 있는데, 어느 날 깨어나보니 역사 속 옛 왕국이나 환상적인 다른 세계의 인물로 환생했거나, 자신이 즐기던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의 캐릭터에 빙의했거나 하는 식이다.

처음에 이들은 서브컬처에 불과했지만, 최근 몇 년간 웹소설을 바탕으로 한 웹툰과 드라마가 증가하고 웹소설 자체의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점차 주류문화로 진입하고 있다. 특히 네이버와 카카오는 최근에 각각 해외 웹소설 플랫폼을 인수하면서 국내외 웹소설의 콘텐트를 웹툰·TV시리즈·영화·게임으로 연결해서 디즈니처럼 종합적인 스토리텔링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바 있다. 그 일환으로 네이버는 최근에 웹소설이 원작인 판타지와 로맨스 웹툰을 대거 신규로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회귀물·빙의물·환생물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합쳐서 ‘회빙환’으로 불리기도 한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포스터. [네이버 시리즈 캡처]

‘재벌집 막내아들’의 포스터. [네이버 시리즈 캡처]

‘회빙환’ 웹소설 중에 웹툰화를 거치지 않고 바로 드라마화가 결정된 소설도 있다. 배우 송중기가 출연을 검토하면서 화제가 된 내년 방영 예정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동명 원작이 그 예다. 주인공은 자신이 충성하던 재벌기업 장남 가족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해 횡령죄를 뒤집어쓴 채 살해당한다. 그 순간 과거로 회귀해서 그 재벌 장남의 어린 조카, 즉 창업주의 막내손자로 환생한다. 장남 집안으로부터 후계자 자리를 빼앗아 복수하기 위해, 미래의 경제 흐름에 대해 전생에서 안 사실들과 전생에서 쌓은 노회한 비즈니스 실력을 발휘한다는 내용이다.

“아,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러이러한 선택을 했을 텐데” “내가 그때 이걸 알았으면 이렇게 했을 텐데” 등등의 후회와 욕망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회귀하거나 내용을 잘 아는 게임·소설의 캐릭터로 환생해 각종 문제를 영리하게 해결하는 웹소설은 모두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다. 이 장르가 최근 10년간 특히 활발하게 양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만화사를 연구하는 국문학자 서은영은 지난해 르몽드 디플로마크에 기고한 글에서 회귀물의 주요 소비층에 대해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세대’ 그리고 ‘게임에 익숙한 세대.’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계층 이동이 더욱 어려워진 상황에서 ‘흙수저’ 청년층은 “인생 역전은 다시 태어나야 가능”하다고 냉소한다. 한편 그들은 게임에서 자신이 플레이하는 캐릭터가 죽으면 손쉽게 리셋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게임을 다시 시작할 때 “세팅(세계관)은 그대로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치는 향상되었으므로 두 번 다시 ‘이생망’은 없다”고 서 박사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회귀물 웹소설의 법칙인 것이다.

한편 ‘회빙환’ 웹소설이 범람하는 이유는 소위 ‘사이다’ 즉 통쾌함을 빨리 줄 수 있기 때문도 있다.

과거 소설에는 주인공이 억울하게 고초를 겪는 ‘고구마’ 상황이 한참 나온 다음, 복수를 준비하는 데에도 한참 걸리고 나서야 본격적인 복수가 펼쳐졌다. ‘화려하게 변신해서 시원하게 복수하는 이야기’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1845)을 보자. 스물이 채 안 된 젊은 선원이었던 에드몽 당테스는 누명을 쓰고 무려 1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동료 죄수인 천재적인 파리아 신부로부터 온갖 지식과 교양을 습득했다. 탈옥한 후에도 파리아 신부가 알려준 보물을 찾고, 백작 지위를 사들여 신분 세탁을 하고, 원수들의 뒷조사를 하고, 정교한 복수 계획의 조력자들을 만드느라 7~8년쯤 더 걸린 다음, 40대 초반부터 파리 사교계에 나타나 본격적인 복수를 시작한다. 고전의 명성에 걸맞게 이 모든 과정이 당시 프랑스 역사와 맞물려 흥미롭게 서술돼 있지만, 현대의 독자들 다수는 이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최근 드라마 ‘펜트하우스’로 ‘막장 드라마의 거장’ 위치를 재확인한 김순옥 작가의 출세작 ‘아내의 유혹’(2008~09). 주인공 구은재(장서희)는 살해당할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후 복수를 위해 변신을 하는데, 그 변신을 위해 각종 외국어와 각종 스포츠와 댄스 등을 섭렵하는 데에 불과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아서 시청자들로부터 전능한 ‘구느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게다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경우 20여 년 동안 자연스럽게 외모가 변해 옛 원수들이 알아보지 못한 반면, 구은재는 1년도 안 되어 원수들 앞에 다시 나타났지만 눈 밑에 점이 새로 생겼기 때문에 원수들은 그저 닮은 사람이라고 쉽게 납득한다. 덕분에 드라마 방영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 밑에 점 찍고 나타나면 알아보지 못하는 패러디가 나오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 어이없는 설정을 조롱하면서도 그 덕분에 빨라진 드라마의 엄청난 속도에 환호했다.

최근의 회귀물 웹소설에서는 아예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새로 지식과 능력치를 쌓는 기간이 따로 없다. 이미 전생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에 다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구마’ 고초 과정은 ‘아내의 유혹’만 해도 30회가 걸렸지만 웹소설은 1~2회에 압축된다. (그보다 길어지면 독자들이 별점 테러를 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간 후 전생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처음부터 원수들의 괴롭힘에 태클을 걸며 소소한 ‘사이다’를 주다가 점점 더 강한 공격을 날려 독자들에게 ‘사이다 원 샷’을 선사한다.

웹소설 독자들은 와신상담의 세월을 소설에서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론, 현실에서 이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회빙환’ 웹소설이 대세인 것은 와신상담을 해도 인생역전이 불가능하며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는 비관주의가 늘어나는 현실의 방증인지도 모른다.

‘부캐’-게임 세대가 다른 인생을 사는 방법

엠넷에 출연한 매드몬스터. [유튜브 캡처]

엠넷에 출연한 매드몬스터. [유튜브 캡처]

‘회빙환’ 웹소설을 읽는 것은 인생 리셋을 하는 주인공에 이입해서 수동적, 현실도피적 즐거움을 잠시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게임에 익숙한 세대는 다른 인생을 사는 좀더 적극적인 방법 하나를 찾아냈다. 지난해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부캐’ 열기에 가담해서 유명 부캐의 ‘세계관 놀이’에 끼거나 스스로 부캐를 만드는 것이다.

부캐(부캐릭터)는 원래 게임 용어로, 온라인 게임에서 본래 사용하던 캐릭터 외에 특정 이유로 추가로 만든 캐릭터를 의미했는데, 개인이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 중에서 평소에 주로 보이던 모습과 다른 것을 꺼내 아예 별도의 인물인 것처럼 활동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지난해 연예인 유재석이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을 부캐로 내세우면서 유행이 시작됐다.

특히 최근에 신곡 ‘다시 만난 누난 예뻐’로 컴백(?)한 아이돌 매드몬스터는 부캐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준다. 미용 필터 앱을 최고 강도로 쓴 듯한 뽀얀 얼굴, 커다란 눈망울, 극단적 V라인, 10등신 비율을 갖춘 이 2인조 보이밴드는 이미 수많은 팬들을 확보했다. 팬들은 매드몬스터의 ‘탄’과 ‘제이호’가 춤출 때 순간적으로 필터가 따라잡지 못하고 개그맨 곽범·이창호의 얼굴이 드러나며 얼굴이 커지는 것에 대해, “결코 오빠들이 필터를 쓰는 게 아니며 기가 약해서 악귀가 씐 것”이라고 항변한다. 또 그들 얼굴 주변으로 화면이 휘어져 보이는 것에 “너무 잘생겨서 시·공간이 휘어지는 것”이란다. 물론 이 ‘팬’들은 두 개그맨의 부캐 세계관에 기꺼이 참여해 같이 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드몬스터에서 주목할 것은 ‘내 루돌프’를 비롯한 그들의 노래가 엉터리가 아니라 진짜로 꽤 듣기 좋다는 것이다. 가수 박재범이 “왜 노래가 좋게 들리지, 아 짜증나”라고 뮤직비디오 댓글에 썼을 정도. 또한 이들은 춤부터 방송 출연, 사생활 공개에 이르기까지, 꽤 정교하게 K-팝 아이돌의 전형적인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드몬스터는 단순 아이돌 흉내나 풍자를 넘어서서 독립된 존재로서 생명력을 지니며 ‘본캐’인 개그맨 곽범과 이창호에 대해 ‘가짜’라는 열등한 위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미용필터앱으로 보정한 얼굴이 실제 얼굴과 비교되며 가짜로 조롱 받는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것이야말로 매체학자들이 말한, 가상과 실재가 우열의 위계 없이 공존하는 상황인데, 이것은 매드몬스터의 경우처럼 진지하고 정교해야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