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 이번엔 '순환출자 금지'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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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같은 순환출자로 기업 지배구조가 여전히 왜곡돼 있다. 출총제의 대안으로 순환출자를 금지해야 한다."(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

"순환출자는 외환위기 타격으로 빚을 줄이는 과정에서 생긴 부득이한 부산물이다. 외국에서도 순환출자 막는 곳은 없다."(전국경제인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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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자총액제한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샅바싸움에서 순환출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총제를 고치겠다며 정부가 순환출자 금지라는 카드를 내밀자 재계에선 더 센 규제라며 펄쩍 뛰고 있는 것이다. 수술대에 오른 출총제와 순환출자 금지안, 어디를 어떻게 째고 꿰매야 하는지 각계의 주장을 들어봤다.

◆ '뜨거운 감자'된 순환출자=공정위는 재계의 요구를 100% 수용해 '조건 없이 출총제를 폐지'할 순 없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총수들이 순환출자를 무기로 여전히 소유 지분의 6배에 이르는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A기업→B기업→C기업→A기업'처럼 꼬리를 물고 이뤄지는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자금으로 지배력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권 위원장이 '출총제 대신 순환출자 금지'라는 큰 원칙을 세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미 공정위는 전경련.시민단체 등과 함께 이달 4일 출총제의 대안을 논의하는 첫 자리에서 순환출자 금지를 첫 주요안건으로 올렸다. 그러나 회의에선 양보 없는 격렬한 찬반 논리 싸움이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철 전경련 상무는 "순환출자는 외환위기 이후 부채비율을 급격하게 줄이거나 민영화기업을 인수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계는 소급적용이 이뤄지면 '재벌 해체'라는 후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바른사회 시민회의)는 "삼성이 순환출자를 해소하려면 6조~7조원, 현대차도 2조원이 들 것"이라며 "일단 대안 없이 출총제를 폐지하고 문제가 생기면 규제안을 마련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 위원장은 "재벌 해체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순환출자 도입해도 현행 출총제보다는 강도가 약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실련 등도 '악성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출총제를 폐지하면 다른 제도를 작동시켜 아직 개선 여지가 있는 지배구조를 감시해야 한다는 논리다.

◆ 출총제는 투자의 적?=재계는 부진한 투자를 되살릴 처방으로 출총제 폐지를 요구 중이다. 이승철 전경련 상무는 "외환위기 전에 10% 이상을 유지한 기업의 투자증가율이 이후 평균 1%대에 그쳤다"며 "특히 전체 기업투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14개 그룹이 출총제 때문에 발목을 잡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영준 경희대 교수(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는 "외환위기 직후 출총제를 잠깐 폐지했으나 실제로 투자는 많이 늘지 않았다"며 "폐지기간 중 기업들은 계열사 출자를 이용해 부채비율을 숫자상으로만 낮추는 데 이용했다"고 맞섰다. 이에 대해 재계는 1998~2000년엔 대부분 기업이 투자는 엄두도 못 내고 몸집 줄이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반박했다.

전경련 이 상무는 "반도체.자동차 등을 빼면 업종이 사양길에 접어든 그룹들은 출총제 때문에 신규사업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정위 이동규 경쟁정책본부장은 "출총제는 말 그대로 주식 사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고 설비투자 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출총제를 적용받는 기업들의 출자 여력도 10조원 정도로 많다"고 말했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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