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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북 '백신 외교' 앞두고...'지원' vs '협상' 선 긋기 나선 北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이 미국을 향해 "백신 등 인도적 지원을 구실로 내정 간섭 하지 말라"며 '백신 지원'과 '북ㆍ미 협상' 사이 선 긋기에 나섰다. 조만간 실제 백신 도입을 염두에 두고 국제사회의 현장 모니터링 및 반입 기준을 본인들에 유리한 쪽으로 완화하기 위한 '밑밥 깔기'란 분석도 나온다.

지난달 18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지난달 18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북한 외무성은 지난 11일 홈페이지에 강현철 국제경제 및 기술교류촉진협회 상급연구사의 글을 싣고 미국을 향해 "코로나19 백신의 인도적 지원을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 악용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개인 명의의 글이긴 하지만 미국이 대북 백신 지원을 구체화한 것도 아닌 데다가, 그렇지 않아도 바이든 행정부는 '대화를 위한 인센티브가 아닌, 순수한 목적의 인도적 지원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라 다소 느닷없는 측면이 있었다.

별 계기 없이 "백신, 악용하지 말라" 뜬금 엄포 #순수한 인도 지원 요구...'협상'과 선 긋기 #향후 실제 도입 염두 "국제 기준 완화 시도"

북한이 별다른 계기도 없이 백신 지원 관련 입장을 선제적으로 밝힌 건 향후 미국의 '백신 외교'가 본격화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다. '백신을 받더라도 대화에 응하진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백신을 주더라도 조건은 달지 말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또 국제적인 백신 배분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 등으로부터 백신을 도입할 경우 백신 지원을 전제로 요구 받을 수 있는 까다로운 현장 모니터링 등을 거절하기 위한 의도란 해석도 있다.

북한 고위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13일 페이스북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백신을 도입하는 경우 백신 보관 장소나 접종 현장 방문과 같이 통상적으로 적용하는 모니터링을 대폭 완화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현장 모니터링을 차단하면서도 효능이 좋은 백신을 제공하라는 일종의 백신 문턱 높이기"라는 것이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지난 9일 분석에 따르면 북한은 영국산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과 중국산 백신은 부작용 우려 및 효능 문제로 도입을 꺼리고, 러시아산 백신도 구매가 아닌 무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상 모더나와 화이자 등 미국산 백신을 원하고 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데, 이 경우 백신 보관 온도를 영하의 특정 온도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콜드체인(저온유통) 시설이 필요하다. 화이자 백신은 영하 80~60도의 극저온 보관이 필수다. 모더나는 영하 20도 상태로 보관해야 하는데, 화이자보다는 유통이 용이한 편이다.

코로나19 방역 상황과 관련한 6일 북한 노동신문 보도. 노동신문. 뉴스1.

코로나19 방역 상황과 관련한 6일 북한 노동신문 보도. 노동신문. 뉴스1.

백신 지원이 제재 예외 인정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다. 대북 백신 지원이 현실화할 경우 백신 물량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관련 시설이나 장비, 관리 인력도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게 정부의 예상이다. 대북 물품 반입은 여러 제재에서 제한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물품에 따라 면제 절차가 필요할 수 있다.

현재 한ㆍ미는 남북 간 교류 및 대북 인도적 사업이 진행될 경우 제재를 일부 유예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장급 회의를 추진 중이다. 지금은 종료된 트럼프 행정부 당시 한ㆍ미 워킹그룹의 후속 협의체 성격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인도적 목적의 대북 지원을 위한 제재 예외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지 그 기준을 가늠할 첫 시험대가 대북 백신 지원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한ㆍ미가 지난 5월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하고,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제공을 계속 촉진"하기로 합의한 것과 달리, 북한은 인권과 인도적 지원을 연계하는 데 대해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다만 최근 북한의 인도적 지원 언급이 자국에 대한 백신 직접 지원 가능성보다는 코로나19 국면에서 미ㆍ중 대결 구도를 의식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ㆍ중 경쟁 속에서 백신도 무기화 되고 있으며, 최근의 북ㆍ중 밀착 행보를 고려할 때 북한이 백신을 얻겠다고 미국에게 쉽사리 손을 벌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으로부터 백신을 지원 받기 위한 의도라기보다는 코로나19 백신의 정당한 지원과 공급을 강조하면서 미국이 이에 반하고 있다는 점을 공격하는 것이란 분석이다.

북한 외무성이 11일 미국을 겨냥한 개인 명의 글을 올린 데 이어 이튿날인 12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나토(NATO)를 비판하는 개인 명의 글을 올린 것도 이런 미·중 간 갈등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미국이 동맹·우방과 사실상 연합해 홍콩, 신장 등의 인권 문제로 중국에 맹공을 퍼붓는 가운데 반대로 아프간 철군 문제로 '인권 역공'을 펼쳐 중국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행보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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