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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 급성 중독은 중대재해, 근골격계 질환은 제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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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호 12면

내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직업성 질환 범위와 적용 대상이 나왔다. 화학물질을 갑자기 다량 흡입해 발생하는 중독 사망과 같은 급성 질환만 중대재해로 본다. 근골격계 질환이나 소음성 난청과 같은 지병형 질환은 제외된다. 노동계 측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기업도 의무 범위 등이 모호하다며 반발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정안 공개 #안전 의무 어겨 1명 이상 사망 땐 #사업주·경영 책임자 징역·벌금형 #과로질환·소음성 난청 포함 안돼 #노동계·기업들 모두 강력 반발

정부는 9일 이런 내용의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정안을 공개했다. 12일부터 다음 달 23일까지 40일 간 입법 예고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 확보 의무를 위반해 1명 이상 사망자가 발생하면 중대재해로 본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가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동안 직업성 질병의 범위와 경영 책임자의 의무를 두고 노사 간에 치열한 논란이 벌어졌다. 이번에 공개된 시행령에 따르면 직업성 질병의 범위를 ▶급성 ▶인과관계 명확성 ▶예방 가능성이 높은 질병으로 한정했다. ‘일시적’ ‘다량의 화학물질에 노출’ ‘급성 중독’과 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질병에 대해서만 중대재해로 인정한 것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에 따라 납이나 벤젠·일산화탄소·이산화질소·황화수소·불화수소·불산·시안화수소·카드뮴·톨루엔 같은 화학물을 갑자기 다량 흡입하거나 노출돼 생긴 급성 중독 등을 중대재해로 봤다. 오염된 냉각수로 인한 레지오넬라증, 산소농도가 부족한 장소에서 발생한 산소결핍증·열사병·렙토스피라증도 이 조건에 충족되는 질환으로 분류했다. 이에 해당하는 질병은 모두 24개다.

반면 노동계가 주장한 소음성 난청, 고혈압, 고지혈증 등은 중대재해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은 “경영계가 건의한 내용만 반영된 솜방망이 시행령”이라며 “시행령 내용으로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실효적으로 작동시킬 수 없고, 오히려 법인과 경영 책임자에게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인식만 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한국청년연대와 청년정의당 등 청년단체는 이날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과로질환이 빠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은 ‘면죄부’”라고 주장했다.

사측도 불만이다. 경영책임자 등이 이행해야 할 의무 범위가 적정한 예산, 충실한 업무 등으로 모호하게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경영 책임자의 의무 등 많은 부분이 여전히 포괄적이고 불분명해 어느 수준까지 의무를 준수해야 처벌을 면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중증도 기준도 마련되지 않아 경미한 질병까지 중대산업재해로 간주될 가능성이 크다”고 반발했다.

전국경제인총연합회는 “안전보건 관계법령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 등 불명확한 점이 있다”며 “법을 준수하는데 기업들의 많은 애로가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도 “시행령에 처벌 대상으로 구체화된 질병의 경우에도 여전히 의학적으로 완벽하게 인과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제정 취지를 정당화하고 시행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진짜 현실’에 밀착한 개선, 보완 노력을 정권과 무관하게 지속해야할 것”이라고 평했다.

기업 현장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한 자동차 회사 관계자는 “애초에 대표를 처벌할 수 있게 해 놓아서 안전 문제를 전담하는, 감옥 갈 바지 대표를 세워야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의견 수렴을 제대로 안한 건지 시행령이 거의 그대로”라고 꼬집었다. 그는 “처벌 기준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정권 입맛에 맞는 기업에게 더 가혹할 수 있고, 기업은 정부 눈치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며 “기업 군기 잡기 내지는 옥죄기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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