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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생존 달린 평화 문제, 정치적 이용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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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70년 다 돼가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화

1953년 시작된 한반도의 정전체제가 오는 7월 27일이면 68년이 된다. 이제 2년만 더 지나면 70년이 되는 정전체제는 한반도에서 불안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2의 전면전을 막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전협정의 주요 조항들은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1953년 ‘적대행위 멈추기 위한 협정’ 정전협정 명문화 #일방의 승리로 끝나지 않아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상황 #남북한 교차 승인으로 남북한 극적 교류의 물꼬 트게 돼 #대선 앞둔 시점, 인내심 갖고 평화협정 체결 협상해나가야

68년 이어온 불안정한 정전체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정전협정조인식장에서 유엔군 수석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중장(왼쪽 앉은 이)과 중·조 연합군 수석 대표인 남일 북한군 대장(오른쪽 앉은 이)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정전협정조인식장에서 유엔군 수석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중장(왼쪽 앉은 이)과 중·조 연합군 수석 대표인 남일 북한군 대장(오른쪽 앉은 이)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정전협정 내용에 바다 위의 군사분계선을 긋지 않았기 때문에 서해 상에서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북한의 일방적 선언에 의해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원회는 1994년부터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으며, 중국군 대표도 철수했다. 또한 북한에 있었던 중립국감독위원단도 모두 철수했다. 자유화된 폴란드는 북한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두 나라로 나누어지면서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사실 중립국감독위원단은 1950년대 중반 정전협정 13조 네 번째 항, 즉 ‘외부로부터 더 발전된 무기를 들여오지 않는다’는 규정을 감시하기 위하여 남북한의 다섯 개 항구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역할은 중단되었고, 1957년 13조 네 번째 항도 무효가 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13조 네 번째 항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정전협정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정전협정엔 왜 비현실적 조항이 들어갔나?

만약 이 조항이 무효화 되지 않았다면, 68년간 외부로부터 더 발전된 무기가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한반도는 강대국으로 성장한 주변국으로부터 무장해제되었을 것이다. 정전협정의 당사국들은 왜 이렇게 비현실적인 내용을 협정에 포함시켰을까? 그 의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1954년 3월11일자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경애하는 대통령께, 우리는 협상을 통해 한국을 통일하려는 동맹국들과 인내심을 갖고 진심으로 협조하고 있습니다. 이들 협상이 90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 그 이후까지는 아무런 단독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방들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평화적인 해결을 이끌어내겠다는 시도의 무모함을 깨닫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군사행동 재개에 대해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의 시한을 3개월로 판단했다. 이는 정전협정 4항에 있는 ‘협정 체결 후 90일 내에 한 급 높은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한반도에서 외국군의 철수와 평화적 조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내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는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공동선언문의 말미에서 ‘미북은 정상회담의 결과를 이행하기 위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장관과 북한 고위층 인사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다음 협상을 할 것을 약속한다’라는 조항이 들어간 이유이기도 했다.

미국의 오판이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전쟁 기간 3배로 늘어난 국방비 감축을 위해 평화협정을 맺고 한국에서 미군을 감축, 철수시키고자 했지만, 3년간 전쟁을 통해 적대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남과 북의 정부가 전쟁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연 정치적 합의에 의한 평화협정 체결이 가능했을까?

불합리했지만, 불가피했던 선택

남과 북은 상대방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평화협정은 가능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협정은 불가능하다. 상대방을 정부가 아니라 사라져야 할 불법 단체로 보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가능하겠는가?

여기에 더하여 정전협정을 맺은 것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전협정은 전쟁이 일방의 승리로 끝나서 항복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을 한 러시아는 독일과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기에 정전협정을 맺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했을 때,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패배했을 때 맺은 협정도 정전협정이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도 일종의 정전협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맺은 후 짧게는 1년, 길게는 6년이 지난 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서는 준비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평화협정에는 전범국가의 책임과 대우, 배상금, 영토 조항 등 중요한 내용이 담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참전국 사이에서의 협상이 필요하다. 정전협정은 전쟁이 끝났지만, 평화협정을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할 때 임시로 체결하는 협정인 것이다.

1953년의 정전협정도 모든 적대행위를 멈추기 위한 협정이라는 내용이 서문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전쟁이 어느 일방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화협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양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극적 변화의 출발점, 6·23 선언

70여년의 시간 동안 극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첫 변화는 1973년의 6·23 선언이었다. 남과 북이 따로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것이 가능하며, 북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국가들과도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 서독과 동독 사이에서 평화적인 기류가 흐르면서 한반도에서도 교차승인, 즉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고, 소련과 중국이 남한을 승인하는 방안이 미국에서 논의되었다. 6·23 선언은 하나의 한국이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선언이자 1980년대 이후 남북 간의 극적인 교류의 기반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 1988년 7·7 선언은 탈냉전과 함께 6·23 선언이 현실화되는 변곡점이 되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있었고, 남북한이 따로 유엔에 가입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으며, 일본은 북한과 수교를 위한 협상에 들어갔고, 북핵 위기의 우여곡절 속에서 1994년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졌다.

통일은 한반도의 분단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목표다. 문제는 당장 하나가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70여년을 따로 살아온 두 지역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하나의 체제 아래 살 수 있겠는가?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 사람들이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이질감이나 통일비용이 이를 잘 보여준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남북한 유엔 가입으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2007년, 그리고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다. 북한을 대화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 정부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비정상적인 외교였다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얼마 전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싱가포르 회담의 합의문을 인정하면서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이제 한반도에는 정전협정을 맺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7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한 급 높은 고위급 정치회담을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그 진위를 파악해야 하지만, 최근 북한의 노동당 규약이 바뀌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신뢰 없는 평화협정 지속 불가능

물론 남과 북이 서로 간의 신뢰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협정이 견고하게 지속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1973년 파리평화협정 이후 베트남의 상황이 잘 보여준다. 그러나 남한의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 정도가 당시 남베트남의 군사력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상황이기에 베트남 상황과 1대1로 비교할 수 없다.

또 하나의 난관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키를 북한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조차 북한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북한이 키를 잡고 있는 한, 앞으로의 협상을 위한 스케줄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지난 70년간 불안정했던 한반도의 상황을 안정되게 바꾸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지속가능한 경제번영과 민주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닥치고 평화’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민주화도, 남북 정상회담도, 북미 정상회담도 모두 이루어냈다.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된다는 인내심이 필요할 때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발 생존이 달린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