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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260억 주무르는 자, 헬리오시티 '아파트 대통령' 누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송파구 가락1동 헬리오시티아파트에는 2만5000명이 모여산다. 뉴스1.

서울 송파구 가락1동 헬리오시티아파트에는 2만5000명이 모여산다. 뉴스1.

지난달 30일 찾은 서울 송파구 가락1동 헬리오시티아파트. 각 동 1층에 있는 우편함에는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 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의 약력과 공약이 적힌 홍보 팸플릿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이 아파트 주민 김 모 씨는 우편함 앞에 서서 10장이 넘는 종이를 손에 쥐고 한참 동안 읽어내렸다.

"정말 직업도 좋고, 학력도 대단한 분들이 출마했네요. 후보자 면면만 놓고 보면 국회의원 선거 저리 가라네요."

9510가구, 2만5000여명이 모여 사는 국내 최대 아파트 단지 헬리오시티에서는 요즘 입대의 회장 선거가 진행 중이다. 32명의 동대표 가운데 3명의 후보가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헬리오시티 입대의 선거는 5일간의 유세 등 선거 운동 기간을 거쳐, 1일부터 5일까지 투표가 진행된다. 반수 이상을 얻은 후보가 2기 입대의 회장이 된다. 입대의는 공동주택관리규약이 정한 법정기구다. 입대의 회장은 주민이 직접 뽑은 '아파트 대통령'격이다.

청송군 인구 모여 사는 헬리오시티 

'빛의 도시'라는 의미의 헬리오시티는 1982년 준공된 6600가구의 가락시영1·2차를 헐고 9510가구(전용면적 39~150㎡) 규모로 재건축한 아파트다. 기존 국내 최대 단지였던 부산 남구 용호동 LG메트로시티(7374가구)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 단지의 대지 면적은 서울 여의도공원의 1.8배이다. 단지 입구에서 끝까지 가는 데만 걸어서 15분이 족히 걸린다. 단지 내 엘리베이터는 209대. 단지 상가 면적(약 5만㎡)을 합치면 축구장의 6배가 넘는다. 대형 건설사인 HDC현대산업개발·현대건설·삼성물산이 함께 지어 공사 전부터 화제가 됐다.

경북 청송군(2만4825명)과 맞먹는 인구가 사는 만큼 회장 선거의 수준도 남다르다. 홍보 팸플릿 제작은 기본이고, 아파트 단지 상가에 선거사무실을 차린 후보도 있다. 각 후보는 2명의 운동원을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할 수 있는데, 후보자 기호와 이름이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유세 활동도 펼친다. 지난달 29일에는 입주민(자치위원)들에게 공약을 설명하는 합동 유세의 장이 마련되기도 했다. 유튜브 홍보 영상으로 온라인 유세를 펼친 후보도 있었다.

헬리오시티 입대의 회장 선거를 알리는 현수막. 김원 기자

헬리오시티 입대의 회장 선거를 알리는 현수막. 김원 기자

고위공무원, 대기업 임원 출신도 뛰어들었다 

이번 입대의 회장 선거와 함께 감사 선거도 진행된다. 감사에는 6명이 출마했다. 전·현직 고위공무원, 대기업 임원, 대학교수, 교직원, 경찰 등 직업도 다양하다. 학력과 경력을 합해 10줄을 적은 후보자도 있다. 경제학 박사인 한 회장 후보자는 '명품 헬리오시티를 만들 경제 전문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지하철 역명 변경, 단지 내 경찰 지구대 유치 등 지역 현안사업에 대한 공약도 등장했다.

코로나19로 대면 접촉이 어려워지자 유세장은 입주민 공식 홈페이지 등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맘카페' 등 입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후보자를 두고 주민들 간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확인되지 않은 상대 후보와 관련한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현실 정치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한 입주민은 "지난 30년 동안 여러 아파트에 살아봤지만, 입대의 회장 선거가 이렇게 과열 양상을 띠는 건 처음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아파트 1기 회장 선거에서는 후보자 간 다툼이 소송으로 번지기도 했다.

헬리오시티 임대의 회장, 감사 선거 후보자 공보물. 김원 기자

헬리오시티 임대의 회장, 감사 선거 후보자 공보물. 김원 기자

한 후보자는 "나름대로 선거와 관련한 자치 규약이 있지만 실제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 비해 느슨한 것이 사실"이라며 "선거 규약을 위반했다고 해서 법적 제재를 할 수도, 아파트에서 쫓아낼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재건축 단지인 데다 규모가 크다 보니 그동안 조합원 간의 갈등이 다른 곳에 비해 컸다"면서 "그래도 2019년 첫 회장 선거 때보다는 큰 잡음 없이 선거가 진행 중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입대의 회장이 된다고 해서 많은 보수나 명예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월 90만원 정도의 활동비가 나오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큰 액수가 아니다. 오히려 각종 주민 민원에 시달리고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주민 간 갈등의 중심에 서야 한다. 회장이나 동대표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도 없다. 이 아파트에서는 지난 2년간 입대의 운영과 관리규약 개정 등을 둘러싸고 "입대의가 소통하지 않는다"는 주민 불만이 컸다. 한 후보자는 "(입대의 회장이) 욕을 먹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2만명이 넘는 국내 최대 아파트 입주민을 대표해 일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크다"고 설명했다.

숫자로 보는 헬리오시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숫자로 보는 헬리오시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헬리오시티의 경우 1년 관리비 규모만 260억원(2020년 기준)에 달한다. 주민들이 매달 내는 아파트 관리비는 입대의 의결을 거쳐 주민을 위한 다양한 사업에 쓰인다. 하지만 이를 관리·감독할 지자체의 의지가 크지 않아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는 입대의 대표 갑질이나 권한을 악용한 입찰 비리가 종종 발생한다.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은 "입대의 선거가 치열한 이유는 관리비 사용에 대한 의결 권한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파트 대단지화 추세…견제 기능 강화해야

헬리오시티 각동 1층 우편함에 빼곡하게 꽂힌 선거공보물. 김원 기자

헬리오시티 각동 1층 우편함에 빼곡하게 꽂힌 선거공보물. 김원 기자

최근에는 아파트를 대단지로 짓는 추세다. 연말 분양을 앞둔 강동구 둔촌동 둔촌주공아파트는 재건축을 통해 헬리오시티보다 규모가 큰 1만2032가구로 탈바꿈한다. 이렇듯 아파트 규모가 커지는 것과 비례해 관리비가 늘고, 자치기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파트 자치기구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주택관리연구원 강은택 박사는 "입주자대표회의의 활동을 견제할 수 있도록 지자체가 노력하는 한편, 관리 주체가 독립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며 "전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입대의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피해는 입주민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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