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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서예, 6·25의 또 다른 증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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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20세기 한국 서예계의 거목인 일중 김충현의 ‘논산무명용사비’(1958) 탁본. 한국전쟁 당시 숨진 병사들을 기렸다.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20세기 한국 서예계의 거목인 일중 김충현의 ‘논산무명용사비’(1958) 탁본. 한국전쟁 당시 숨진 병사들을 기렸다.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의 일이다.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은 충남 온양에 세울 이충무공 기념비 글씨를 의뢰받았다. 국어학자 위당(爲堂) 정인보(1893~1950)가 5000자가 넘는 길고 긴 비문을 짓고는 글씨를 부탁해 왔다. 일중은 회고록『예(藝)에 살다』(1999)에서 “일생 동안 써낸 비문 중에서 가장 큰일”이라고 돌아봤다. 그는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울여 써 내려 갔다.

일중 김충현 탄생 100년 #한국 현대사와 함께해와 #일제 맞선 한글서체 창안 #“내 글씨 절대 모방 말라”

 글씨를 완성하기 전에 6ㆍ25가 터졌다. 위당은 전쟁 중에 납북됐고, 기념비 건립은 중단됐다. 반면에 일중은 피란길에도 위당의 비문 원고를 소중히 간직했다. 결국 1951년 8월 시민 성금과 국비 등으로 충무공 사적비를 세울 수 있었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일중은 충무공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충무공의 옥포해전을 기리는 옥포 대승첩기념탑명(1957)도 썼다. 일중이 발표한 최초의 한글 고체로 꼽힌다. 일중이 창안한 ‘고체’는 한글 고판본에 착안한 글씨를 포괄하는 용어다. 한글 궁체보다 글자가 크고 힘차다. 시조시인 노산(鷺山) 이은상(1903~82)이 짓고 일중이 쓴 기념탑비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바다 외로운 섬 옥포야 작은 마슬(마을), 고난의 역사 위에 네 이름 빛나도다. 우리 님 첫 번승첩이 바로 여기더니라.’

 일중은 6·25 당시 스러져간 병사들을 위한 비문 글씨도 썼다. 1958년에 쓴 ‘논산무명용사비’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중략) 우리는 몸을 나라에 바친 무명용사-. 그러나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겨레의 횃불~.’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지난 8일 개막, 다음 달 6일까지 계속되는 김충현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일중, 시대의 중심에서’에서 그 탁본을 만날 수 있다. 한국전쟁 71주년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국필(國筆)’로 불린 일중은 숱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한국인의 고단한 삶에 관심이 컸다. 일례로 해방 이후 처음으로 들어선 한글 비인 ‘유관순 기념비’(1947)가 있다. ‘긔미 독립운동 때 아(우)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최(자취)라. 긔미 삼월 일일 독립선언이 나며 국내 국외에 만세 소리 서로 연하얏었다’로 시작한다. 반듯하고도 정갈한 한글 궁체로 썼다.
 전시장에는 ‘4·18혁명기념탑’ 탁본도 나왔다. 4·19 전날 서울 종로에서 시위 중에 피습당한 고려대생을 추모하는 글씨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중략) 천지를 뒤흔든 정의의 함성’이 국한문 혼용체로 적혀 있다. 일중이 남긴 비문과 동상명은 무려 700여 개에 이른다. 1960~70년대 군사정권을 선전하는 기념물도 있지만 윤봉길·김구·손병희·한용운 등 항일운동을 이끈 독립지사를 기린 작품도 많다.

일중의 '정과정'(1978). 일중이 정립한 한글 고체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일중의 '정과정'(1978). 일중이 정립한 한글 고체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일중 김충현이 쓴 '우리 글씨 법'(1948) 교재. 일중은 서예가이자 교육자였다.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일중 김충현이 쓴 '우리 글씨 법'(1948) 교재. 일중은 서예가이자 교육자였다. [사진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일중은 시대의 증언자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다른 장르에 밀려 영역이 쪼그라든 서예이건만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서예는 우리 문화판의 주요 발신지 중 하나였다. 단순히 예쁘고 고운 글씨를 넘어 동시대인과 함께 호흡하는 소통 창구였다. 일중은 거리낌이 없었다. 시집·소설책 표지를 쓰고, 신문·사보·잡지 제호를 쓰고, 아파트·기업체 상호까지 썼다. 서예는 낡았다는 편견을 깨고 일상과 사회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일중에게 서예는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독학으로 개발한 한글 서체가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항일·애국심 같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진 않았다. “우리 글을 내가 써보지 않으면 누가 쓰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훈민정음·용비어천가의 자형(字形)을 연구하며 22세 젊은 나이에『우리 글씨 쓰는 법』도 지었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한 핵무기”(이동국 예술의전당 큐레이터), “해방 후 한국 문화가 풍성하게 꽃필 수 있는 토대를 마련”(김현일 백악미술관장) 등의 평가를 받았다.

 이번 자리는 아쉬운 구석도 있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소장품 위주로 꾸며 일중과 한국 사회가 맺어온 지난 100년이 온전히 살아나지 못한 듯하다. 그럼에도 그의 한마디는 매섭기만 하다. “나는 절대 내 글씨를 모방하지 않도록 지도한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내 글씨만 흉내 내다 보면 결국 나의 아류가 될지언정 나보다 더 나은 글씨를 쓸 수 없다.” 자기 스승의 글씨만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한국 서단의 누습(陋習)을 꾸짖는 듯하다. 어디 글씨뿐이랴. 문화든 정치든 사회든 스승을, 선배를 딛고 서야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