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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역사 딛고 새롭게 태어났다|폴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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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헝가리에 이어 폴란드와의 국교수립이 지난 1일 정식 발표됐다. 동구의 개혁물결 속에 우리나라가 폴란드와 국교의 물꼬를 튼 것은 앞으로 유고슬라비아 등 다른 동구권국가와의 수교가능성을 예고하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있다. 폴란드는 과연 어떤 나라이고 우리나라와의 관계발전은 어디까지 이루어질 수 있을지 정리해본다. <편집자주>
역사적으로 폴란드가 걸어온 길은 수난의 연속이었으며, 그 수난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세사에서 폴란드는 강대국 독일과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시련을 겪어왔다.
1772년부터 95년까지 폴란드는 3차례에 걸쳐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 1795년엔 국가자체가 멸망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로부터 1918년까지 1백20년 동안 나폴레옹에 의한 단기간의 바르샤바공국시대(1807∼15)를 제외하곤 폴란드인들은 나라 없는 망국민이었다. 「피아노의 시인」쇼팽은 망국의 설움을 폴란드 민속음악인 폴로네즈로 노래했으며 셴키에비치는 『쿠오바디스』로 폴란드 민족혼을 일깨웠다.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 틈을 타 폴란드는 새로 태어났다. 폴란드는 독립을 선언하고 신생 소련과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대, 대국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39년 나치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양분해 동은 소련이, 서는 동일이 차지해 버렸다.
점령기간 중 폴란드인들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독립항쟁을 벌였다. 그중 가장 처절한 것이 바로 44년 바르샤바시민봉기로, 이때 약 24만명의 바르샤바시민들이 독일군에 의해 살육됐고 63만명이 독일군 수용소에 수감돼 죽어갔다.
제2차대전으로 폴란드는 6백만 국민이 사망했으며, 국부의 38%를 상실하는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4년 폴란드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다. 소련은 진주 즉시 친소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설립했고 48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노동자당(공산당)이 토착세력인 사회당을 흡수, 「폴란드통일노동자당」을 만들어 그들이 정권을 잡도록 지원함으로써 폴란드는 다시 소련영향권 하에 들어갔다.
그 후 47년 코민포름, 49년 코메콘, 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이 됨으로써 완전히 소련의 한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전후 폴란드는 경제복구에 총력을 기울였다. 산업시설의 3분의2가 파괴된 반면, 독일로부터 지하자원이 풍부한 술레지엔·포메라니아를 얻어냄으로써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폴란드는 우선 중공업을 중핵으로 하는 공업발전, 그리고 농업에선 영농집단화를 과감히 추진했다.
그러나 획일적 중앙집중계획경제는 곧 그 결함을 드러내 실패하고 말았다. 농업부문에선 생산성 저하, 공업부문에선 중공업우선으로 극도의 소비재부족을 초래했다.
대마침 소련에서 진행중이던 스탈린 격하운동에 자극돼 대규모 민중폭동으로 발전했다. 56년의 유명한 「포즈나니폭동」이 그것이다.
그 후 집권한 토착 공산주의의 출신의 고물카는 사회주의체제의 다양성과 대소관계에 있어 주권회복 등을 표방했다.
경제정책에 있어선 계획경제의 부분적 수정을 통한 생산증대를 꾀했으나 농업생산부진·소비재부족은 여전했고 여기에 물가상승·실업증대로 국민의 불만이 고조, 70년 고물카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고물카의 뒤를 이은 기에레크는 당시 무르익고 있던 동서 데탕트를 배경으로 서방측으로부터 기술·자본을 도입한 공업화정책을 과감히 시도하고 농업에선 자영농 육성정책을 적극 펴나갔다.
그러나 한동안 성장을 보이던 폴란드경제는 76년 세계경제 침체로 무역수지악화·외채증가·인플레이션의 삼중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특히 80년에는 마이너스 13% 성장을 기록, 국민생활수준은 74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같은 와중에서 80년7월 정부가 육류가격인상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으며 고도의 정치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그다니스크 레닌조선소의 전공출신 지도자 바웬사였다. 바웬사가 이끄는 노동자세력과 정부는 8월말 노동자들의 파업권과 독립노조(자유노조) 결성권을 허용하는 합의문서에 서명, 공산국가 최초로 관인노조 아닌 독립노조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기에레크의 뒤를 이어 집권한 카니아정권 역시 악화일로의 경제에 손을 쓰지 못하고 다시 생필품가격을 인상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노동자들의 스트라이크가 또 한번 전국을 휩쓸었다.
81년10월 국방장관이던 야루젤스키장군이 카니아 대신 당제1서기에 취임하고 수상직을 겸함으로써 전권을 장악했다.
야루젤스키는 무려 1천만명으로 늘어난 자유노조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그 해 12월 계엄령을 선포, 자유노조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자유노조 지도자·반체제 지식인 등 5천명을 체포했다.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선포 직후인 82년1월부터 경제개혁을 추진, 83년에는 경제성장을 다시 플러스로 반전시키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에 고무된 야루젤스키정부는 87년10월 야심적인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야루젤스키는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물가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정, 식량·연료의 40% 인상 등을 주요내용으로 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과반수지지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경제개혁정책은 큰 시련을 맞았다.
더욱이 87년에는 악천후로 인한 농업부진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여건을 더욱 어렵게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국민의 불만이 다시 폭발, 88년8월 남부 술레지엔 탄광지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탄광노동자들은 불법화된 자유노조의 합법화를 요구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함으로써 바웬사는 다시 한 번 뉴스의 초점이 됐다.
폴란드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유노조와 대화를 시도, 키슈차크 당시 내무장관은 바웬사와의 회담에서 「국민적 화해 실현을 위한」 범국민원탁회의 개최에 합의했다.
지난 4월 우여곡절 끝에 열린 원탁회의는 자유노조의 합법화를 결정하고 6월 부분적 민주총선을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폴란드정부가 ??? ???? ??? 내리게 된 배경은 폴란드 정국을 자유노조의 협조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 무거운 짐을 정부와 자유노조가 나눠지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6월 실시된 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주도하는 「시민그룹」은 상원 1백석 중 99석, 그리고 하원에서 자유경선을 치른 1백61석 모두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반면 공산당은 하원 전체 4백60석 중 불과 38%인 1백73석을 확보사는데 그쳤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지금까지 공산당의 들러리역할에 만족해오던 통일농민당·민주당·가톨릭당 등 군소정당이 공산당에 등을 돌리고 자유노조측과 협력의사를 밝혔다.
자유노조측은 처음엔 정부구성을 거부, 야당으로 남기를 고집했으나 곧 태도를 바꿔 비공산당계 자유노조주도의 연립정부 구성을 수락했다.
다만 대통령을 비롯, 내무·국방 등 4개 각료직은 공산당에 배정하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잔류, 사회주의권을 이탈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9월12일 드디어 폴란드에 전후 동유럽사회주의권 최초의 비공산계 주도정부가 들어섰다. 시임 국무총리엔 바웬사의 오랜 친우이자 브레인이며 신앙심 깊은 변호사 출신 마조비예츠키였다.

<정우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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