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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36세 이준석의 가볍고 빠른 행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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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스포츠와 바둑은 승부가 난다. 바둑은 ‘반집’이란 허수를 만들고 축구는 승부차기를 도입해서라도 기어이 승부를 낸다. 승부가 나는 종목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선수들의 ‘나이’가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바둑은 올해 다승 20위 안에 40대 기사는 한명도 없다. 17세 때 세계를 제패했던 전설 이창호는 40대 기사 중 유일하게 바둑리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의 랭킹은 어느덧 60위. 승부 세계는 나이에 가혹하다. 야구천재 이종범과 이승엽은 모두 40대 초반에 은퇴했다. 50세의 필 미켈슨이 골프대회 우승을 차지하자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도 ‘고목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승부 세계의 섭리를 살짝 건드렸기 때문이다.

바둑·스포츠와 닮은 듯 다른 정치 #자격시험 등 승부요소 도입 눈길

예술이나 학문은 승부가 나지 않는다. 시합으로 겨루지 않는다. 나이는 별 상관이 없다. 5세 신동도 있고 100세 작가도 있다. 명성을 얻지 못하면 제아무리 뛰어난 진주라도 진흙에 파묻혀 있다가 죽은 뒤에 유명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승부가 나지 않는다는 건 좋은 측면도 많다. 바둑처럼 승부를 겨룬다면 추풍낙엽이 될지도 모르는 노장들도 원로나 스승이 되어 죽는 날까지 존경받을 수 있다. 요즘 대중음악은 트로트와 크로스오버 등의 경연이 전에 없이 활발하다. 승부를 낼 수 없는 영역을 기어이 승부로 끌고 간 것인데 그 바람에 무명가수들 중에서 수많은 스타가 탄생했다. 바둑이나 스포츠처럼 승부가 명명백백하지는 않아 가끔 사고도 나지만 일반 대중이 승부를 좋아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느 쪽에 속할까. 정치는 양면이 다 있다.

비전이나 정책을 말한다면 정치는 예술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 쪽일 것이다. 그러나 ‘선거’라는 측면에서는 정치가 전쟁보다 더 확실하게 승부가 나고 만다. 그것도 한 표만 이기면 되는 승자독식의 비정한 승부다. 이 같은 정치의 두 얼굴을 하나로 만들면 소위 성공한 정치가가 된다.

최근 정치판은 36세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야당 사람들은 왜 36세라는 파격적인 젊음을 선택했을까. 선거에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염원이 작용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선거는 물론 내년 대선을 말한다.  사실 정치 나이는 스포츠나 바둑처럼 적정 나이를 규정할 수도 없고 규정할 필요도 없다. 중국 은나라 때의 정치가 강태공은 72세에 처음 출사해 주나라를 세우는 데 일등 공신이 됐고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정치가 감라는 불과 12세 때 재상이 됐다. 그들의 성공엔 시대의 몫도 있고 개인 몫도 있다. 이 대표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무게감 대신 빠르고 과감한 창을 원했다.

이준석 대표는 지방 선거에 나설 후보자들에게 자격시험을 부여하겠다고 말해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더니 당대표가 된 후엔 토론 배틀을 통해 당 대변인을 뽑겠다고 말해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정치의 실핏줄에 승부 요소를 도입하겠다는 것인데 16강부터 생중계한다는 말은 바둑시합에서 많이 듣던 말이어서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정치 예능이랄까, 정치 배틀이랄까. 뭔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려 한다. 바둑으로 치면 가볍고 빠른 행마가 연상된다. 토론배틀에서 트로트 경연이나 크로스오버 경연처럼 무명 신인이 스타로 떠오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인기를 끌고 그 여파로 전국에 정치 교실이 우후죽순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장막 안에서 천 리를 내다본다’는 말이 있다. 책략보다는 통찰이, 밀실의 어둠보다는 심오함이 느껴지는 말이어서 바둑과 정치가 고상하게 이 말을 애용했다. 한데 이제 그 장막이 걷히려 한다. 바둑은 AI가 이미 장막을 걷어갔고 정치는 젊음이란 새 얼굴이 장막을 걷어가려 한다. 최소한, 한바탕 바람이 쓸고 간 뒤에 남는 건 있을 것이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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