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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국인 정신건강 위기, 핀란드·네덜란드 경험 배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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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6·25전쟁 이후 전쟁과 가난을 딛고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성취했지만 기대와 달리 한국인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그럼 전 세계에서 국민 행복지수 1위인 핀란드는 원래 행복한 나라였을까. 사실 핀란드도 과거에 북유럽 대부분 국가처럼 자살률이 치솟으며 정신건강 위기를 경험했다. 하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위기를 극복한 나라다.

전문가 집중 육성, 정신건강 돌봐 #국가 심리사 제도 속히 도입해야

급격한 산업화는 정신건강 위기를 초래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들의 정신건강 지표, 핵심 3대 인력, 정신건강 예산을 바탕으로 정책 및 제도를 분석한다. 이에 따르면 국가 심리사(Licensed psychologist)를 집중적으로 양성한 핀란드는 회원국 중 심리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즉, 핀란드는 인구 10만명당 109명의 심리사를 확보하는 등 정신건강 인력과 제도를 보강해 자살률을 크게 낮추고 국민의 심리적 안녕감을 높였다.

네덜란드도 정신건강 모범 국가다. OECD가 정신건강 통계를 조사한 이후 네덜란드는 지속해서 회원국 평균보다 낮은 자살률을 수십년간 유지하고 있다. 10만명당 90명의 심리사를 확보한 네덜란드는 회원국 중 가장 많은 심리사를 확보한 국가 그룹에 수십 년째 속해 있다. 반면 자살률이 높고 심리적 안녕감 지표에서 최하위권인 한국과 일본 등은 10만명당 심리사 수가 4명 이하여서 OECD 평균 26명보다 현저히 낮다.

OECD 통계에서 자살률과 심리사 수는 역 상관관계가 관찰된다. 이에 2013년 OECD는 한국 정부에 전 국민 대상 심리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라고 제안했다. 정신건강 문제가 경미할 때 조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인력과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권고였다. 감기에 걸려도 병원을 찾는 한국인들이지만 마음이 아파 정상 생활이 안 될 때 심리적 도움을 구할 곳이 제도적으로 제대로 마련돼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고도 산업화에서 증가하는 아동 학대, 사회적 고립과 실직 등 다양한 심리사회적 문제들이 국민 정신건강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코로나19까지 겹쳐 정신건강은 중대 위기를 맞고 있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인의 불안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많은 멕시코·영국·미국 다음으로 높은 30%로 조사됐다. 우울은 회원국 중 가장 높은 36.8%로 조사됐다. 1990년대 말부터 상승해 OECD 최상위권을 차지한 한국의 자살률도 감소할 기미가 없다. 청년층의 경우 오히려 늘고 있다.

그동안 자살 예방법을 만들고 국무총리 산하에 자살예방정책위원회가 신설돼 부처 간 조율과 통합이 잘되도록 제도화했다. 올해 2차 정신건강 기본계획이 집행되고 있다. 하지만 정신건강 지표가 좋은 OECD 회원국들이 상당히 공을 들이는 핵심 전문 인력 양성 및 적재적소 배치 노력이 한국에서는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OECD 회원국에서는 심리사가 과학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근거-기반 심리 서비스를 핵심 정신건강 인력의 역할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심리사가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없다. 이는 한국의 정신건강 시스템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다.

사실 20세기에 가입한 OECD 회원국 중 심리사 제도가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심리사 제도 도입은 정치적 이념이나 직역 간 이해와 무관하다. 마음의 고통이 심한 국민을 위한 양질의 심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가 경쟁력에 밑바탕이 되는 정신건강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국회는 심리사 법제화를 담은 ‘심리 서비스법’을 조속히 입법해야 한다.

OECD 가입 25주년을 맞은 한국은 심리사 제도 도입을 더는 미루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도 이제 안심하고 심리사가 제공하는 양질의 심리 서비스를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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