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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비리, 갑갑함, 갈 곳 없음…열아홉 흙수저의 성장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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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화 ‘낫아웃’(감독 이정곤)은 고교야구선수 광호의 눈을 통해 부조리한 체육계 관행을 그린다. 25㎏을 증량하며 실제보다 12살 어린 배역을 소화한 정재광의 열연이 돋보인다. [사진 kth·판씨네마]

영화 ‘낫아웃’(감독 이정곤)은 고교야구선수 광호의 눈을 통해 부조리한 체육계 관행을 그린다. 25㎏을 증량하며 실제보다 12살 어린 배역을 소화한 정재광의 열연이 돋보인다. [사진 kth·판씨네마]

꿈에 그리던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짜릿한 결승타를 쳤다. 자신감이 부풀었으니 감독의 ‘프로팀 연습생 제안’ 따윈 안중에도 없다. “후회 같은 거 안 한다”고 큰소리쳤는데 정작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특기자로 대학 진학하려니 친구가 “거기 내가 오랫동안 지원하려던 거 알지 않냐”고 한다. 그 와중에 “아버진 왜 안 모시고 오냐” 닦달하는 감독, 대체 얼마를 바라는 걸까.

내일 개봉 ‘낫아웃’ 감독 이정곤 #야구 입시비리 폭로한 선수 모티브 #프로지명 실패, 대학 진학도 가시밭 #기댈 건 한탕…그 또래 소외감 담아

3일 개봉하는 ‘낫아웃’(감독 이정곤)은 열아홉 고교야구 입시생 광호(정재광)의 눈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불안한 청춘들을 그려낸 영화다. 다만 야구가 하고 싶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는데 칼국숫집 홀아비 아들이 꾀할 수 있는 건 위험하고 불법적인 ‘한탕’뿐. 이정곤(33) 감독이 그 나이 즈음 느낀 세상도 다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어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지는 잘 몰랐던, 어렴풋한 비리, 갑갑함, 갈 곳 없음을 녹이려 했다.” 지난달 27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감독의 말이다.

이정곤

이정곤

야구 광팬인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늦깎이 졸업하고 첫 장편영화를 준비하면서 경계선에 선 청춘 이야기에 야구를 접목하기로 마음먹었다. 모티브가 된 건 2014년 서울고의 황금사자기 우승 주역인 톱타자 홍승우 선수였단다. “영화 내용 비슷하게 프로 지명과 대학 진학에 실패했는데 이 분은 내부고발자가 되면서 야구계에선 사실상 매장당하고, 결국 공부로 3수해 서울대에 진학, 동아리 야구를 계속했다. 드래프트 탈락 소식을 주말 친선시합 중 확인하는 장면도 그의 경험에서 땄다.” 그 밖에도 여러 야구계 사람들을 만나 대학-고교 간에 관행이 된 특기자 원서 할당 등 구조적 문제를 생생하게 엮었다.

특히 감독 몰래 특기자로 응시한 광호의 실기시험 ‘펑고’(야수의 수비 훈련) 장면이 압권이다. 이를 악물고 공을 잡던 광호는 작심하고 무리하게 주는 플라이에 허덕이다 마침내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짙은 어둠과 함께 좌절하기까지 카메라가 집요하게 따라갈 때 관객 역시 헐떡이는 호흡을 내 일처럼 체감한다. “실제로도 실기시험 때 정해진 결과로 몰고 가는 일이 허다하다더라. 공에만 집중하던 광호가 ‘나 불합격하겠구나’ 감을 채는 과정을 촬영감독과 배우가 긴밀하게 뽑아냈다.”

애초 야구는 하나도 모르던 정재광은 영화를 위해 몸무게 25㎏ 늘리며 실제보다 12살 어린 극 중 역할을 소화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염두에 둔 배우, 슬프고 처량한 느낌의 눈이 매력적”이라는 감독의 평대로, 첫 주연작에서 열아홉의 치기·질투·불안·호기심을 눈빛 속에 뿜어낸다.

흙수저들의 성장통을 담은 배경엔 “은수저였다가 흙수저로 내려앉은” 경험이 작용했다. 공기업에 다니다 IMF 외환위기로 빵집을 차린 아버지의 고단함이 칼국수 식당에 묻어난다. 디자인 전공이었다가 다시 공부해 영화감독이 된 건 “내가 그랬듯 타인에게도 영화로 위로를 보내고 싶어서”였다고.

“주변에 자리 못 찾고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는 친구들이 많아요. 꿈꿀 수 있는 게 작아졌는데 그것마저 힘들고, 월급 모아선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으니 다들 한탕만 바라며 카톡방에서 코인(암호화폐), 주식 얘기하는 거 아닐까요. 저요? 영화 잘 찍어 그게 코인이 되길 바라죠.(웃음)”

“거대한 비리, 시스템의 폭력성 고발이 아니라 광호 시점에서 그 나이 아이들이 느끼는 소외감을 담고자 했다”는 영화는 올 전주국제영화제에서 CGV아트하우스상, 왓챠가 주목한 장편, 배우상 등 3관왕에 올랐다. 제목의 ‘낫아웃’은 타자가 삼진아웃을 당했을 때 포수가 공을 놓치면 1루로 뛸 기회가 주어지는 야구 규칙. 좌절한 청춘들에게 ‘끝난 것 같지만 기회는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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