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배영은의 야野·생生·화話] 경조사 휴가와 특별 엔트리가 반가운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7면

지난달 29일 52번이 새겨진 한화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선 김태균. KBO의 ‘은퇴 경기 특별 엔트리 제도’ 덕분에 동료를 엔트리에서 빼지 않고도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뉴스1]

지난달 29일 52번이 새겨진 한화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선 김태균. KBO의 ‘은퇴 경기 특별 엔트리 제도’ 덕분에 동료를 엔트리에서 빼지 않고도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뉴스1]

몇 년 전 한 퀴즈 프로그램에 ‘세종대왕이 세계 최초로 도입한 제도는 무엇’이라는 문제가 나왔다. 답은 ‘남편의 출산 휴가’였다. 세종은 종전 7일이던 관노비의 출산 휴가를 산전 30일, 산후 100일로 늘려 사망률을 현저히 낮췄다고 한다. 또 “아내 몸조리 때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며 남편에게도 30일간 산후 출산 휴가를 줬다.

2019년 도입 후 휴가 사용자 늘어 #가족의 중요한 순간 함께 하게 돼 #유연한 엔트리 운영, 배려 돋보여 #가치를 찾게 된 KBO리그 선진화

세종은 이미 조선 시대에 출산 휴가의 필요성을 깨닫고 권장했다. 반면 야구계는 몇 년 전까지도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졌다. 프로야구 감독, 코치, 선수가 시즌 중 가정사로 경기장 비우는 것을 ‘직무 유기’로 여겼다. 아이 셋을 둔 한 베테랑 선수는 “아내 출산 때 한 번도 곁에 있어 본 적이 없다”고 귀띔했다.

변화는 2019년부터다. 프로야구 출범 38년 만에 ‘경조사 휴가’가 도입됐다. 직계 가족 사망이나 자녀 출생을 사유로 5일간 경조 휴가를 신청할 수 있게 됐다. 휴가자는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뒤 10일이 지나지 않아도 원할 때 복귀할 수 있다. 휴가 기간도 1군 등록 일수에 포함된다. 일종의 ‘유급 휴가’다. 그 덕에 누군가는 갓 난 아들을 곧바로 품에 안았고, 누군가는 선친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첫 시즌에는 안치홍(롯데 자이언츠·당시 KIA 타이거즈), 강민호(삼성 라이온즈) 등 4명이 수혜자였다. 지난 시즌에는 최정(SSG 랜더스), 허경민(두산 베어스) 등 10명으로 늘었다. 올 시즌에도 김재호(두산)와 채은성(LG 트윈스)이 경조 휴가를 썼다. 채은성은 제도 도입 후 두 차례 경조 휴가를 쓴 유일한 선수다. 2019년 9월 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달랬고, 올해 첫 딸을 얻은 기쁨을 누렸다. 채은성은 휴가 복귀 직후인 지난달 28일, 팀 승리의 주역이 됐다.

메이저리그(MLB)는 한국보다 9년 앞서 2011년부터 비슷한 제도를 운용했다. 롯데 이대호도 MLB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이던 2016년 아들이 태어나 출산 휴가를 썼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2013년 6월 두 경기를 감독 대행 체제로 치렀다. 감독과 수석코치가 나란히 자녀의 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자리를 비워서였다.

일본 프로야구는 그 반대다. 일본 야구의 거물인 호시노 센이치 전 한신 타이거스 감독은 1997년 부인 사망 소식을 구단에도 알리지 않은 채 경기에 나섰다. 2003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또다시 “팀 우승이 먼저”라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 언론과 팬들은 그런 그에게 “남자답다”며 찬사를 보냈다.

KBO리그는 과거 MLB보다 일본 야구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세월이 흘러 그 사이의 ‘KBO식 접점’을 찾은 모양새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키는 데 집중하는 쪽이다. 올해 도입된 ‘은퇴 경기 특별 엔트리’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다른 선수를 2군에 보내지 않고도 은퇴 선수를 하루만 1군 엔트리에 초과 등록할 수 있는 규정이다.

지난해 은퇴한 김태균(한화 이글스)이 첫 수혜자였다. 그는 지난달 29일 모처럼 한화 유니폼을 입고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달려나가 익숙한 1루 앞에 섰다. 그렇게 김태균과 한화 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추억 하나가 남았다. 많은 선수가 그라운드를 떠날 거다. 그들이 ‘선수’로서 팬들에게 작별 인사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갈수록 유연해지는 KBO리그 선진화가 반갑다.

배영은 야구팀장 bae.younge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