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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하우스보다 못한 암호화폐 당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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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잘나가던 직장을 뛰쳐나와 암호화폐 산업에 뛰어든 지 4년째. 조심스럽던 K의 말문이 열린 것은 만난 지 30여 분이 지나서였다. 그는 최근 BK(뷰티플 코리아) 코인을 발행했다고 했다. 그는 곧 BK 코인을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ICO)할 계획이다.

돌과 옥을 함께 태우는 건 쉽다 #돌은 버리고 옥만 골라내는 실력 #이 정부에 기대하면 안 되는 건가

“삼천리 금수강산에 맞춰 국내 관광지 3000곳을 좌표로 찍어 준다. 관광객이 한 곳을 들를 때마다 코인을 하나씩 준다. 관광지는 맛집일 수도 있고 불국사 같은 명승지일 수도 있다. 한국의 자랑거리는 모두 망라한다. K팝이라면 BTS 빅히트의 사옥이거나 블랙핑크의 숙소일 수 있다. K반도체는 대구의 이병철 삼성 회장 생가, K무비는 윤여정 영화의 산실 충무로…. 이런 식으로 전 세계인에게 한국의 매력을 알리고 찾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3000곳을 다 돌면 코인 3000개가 생긴다. BTS 코인은 그것 하나로 기념이 될 수 있다. 이걸 맛집에서 쓸 수도 있다. 말로만 관광 한국이 아니라 진짜 관광 한국의 새 장을 열 수 있다.”

K는 이를 “디지털과 현실의 결합, 미래 산업의 선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왜 암호화폐인가. 이런 사업은 아이디어는 있지만 증시를 통한 기업공개(IPO)는 안 된다. 아직 매출도, 이익도 없어 상장 기준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통 방식으로 자금과 사람을 모으고 회사를 키우는 건 부지하세월이다. 디지털 시장은 하루가 달리 변한다. 우물쭈물하다간 사업 기회를 영영 잃을 수도 있다. 암호화폐 상장(ICO)은 이런 문제를 단칼에 해결해 준다. K는 “블록체인 기술과 전문 인력부터 투자 환경까지 한국의 암호화폐 생태계는 세계 최고”라며 “아이디어 하나로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미래산업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K의 꿈이 현실화하려면 그러나 불법과 합법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거쳐야 한다. 2017년 암호화폐 붐 때 정부는 ICO를 원천 금지했다. 국내 회사들은 정부 감시를 피해 싱가포르나 버진아일랜드에 법인을 만든다. K도 에스토니아에 법인을 세웠다. 국내에 감시·감독·규제 기관이 없다 보니 ‘듣보잡 코인’이 우후죽순 쏟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2017년 1000개였던 상장 코인은 지난 24일 1만 개를 넘어섰다.

상장 심사도 엉터리다. 상장 권한은 코인 거래소가 갖고 있다. 정부는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며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거래소마다 기준이 들쭉날쭉한 데다 애매모호하다. ‘표절·사기 등 평판에 문제가 있나’ ‘토큰의 사용처가 명확한가’ 등이 체크 리스트다. 이런 체크 리스트로는 회사의 건전성이나 경영 투명성 등을 판별하기가 애초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법 테두리 밖에 있으니 아무도 검증 책임이 없다. 이런 상황을 방치해놓고 투자자 보호를 말하는 건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것이다.

시장엔 늘 규제와 감독을 넘나드는 파괴자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혁신의 원동력이다. 암호화폐는 시장 파괴자다. 규제와 감독은 시장 파괴자와의 이인삼각 경기다. 정부에 따라 시장 파괴자를 다루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미국은 지켜보다 괜찮은 것만 골라 합법화한다.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의 나스닥 상장이 예다. 중국은 내버려 뒀다 문제가 생기면 단칼에 엄벌한다. 한국은 이도 저도 아니다. 여론이 시끄러워지면 시늉만 낸다. 그러니 미래산업으로 키우기 위한 감독과 규제의 제도화는 언감생심이다.

젊은이들이 돈 잃는 줄 몰라서 암호화폐에 뛰어드는 게 아니다. ‘가붕개’를 벗어날 기회가 거기밖에 없어서다. 암호화폐보다 돈 잃을 확률이 훨씬 높은 복권은 정부가 판매하고 장려한다. 복권은 사라면서 왜 암호화폐는 말리나. 정부가 하는 일이란 게 고작 “암호화폐는 도박, 어른이 말려야 한다”고 야단치는 건가. 그러면서도 세금은 거두겠단다. 하우스는 많이 잃으면 돈도 빌려주고 콜라라도 서비스한다. 하우스보다 못한 당국이란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