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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믿었던 용산 그 동네, 돌아온 건 "빌라거지" 수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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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를 사이로 왼쪽에는 도시재생구역으로 지정된 서계동과 청파동이, 오른쪽에는 재개발이 진행된 만리동이 있다. 주민들은 ″재개발 하나로 동네의 '계급'이 갈라졌다″고 말한다. 박사라 기자.

횡단보도를 사이로 왼쪽에는 도시재생구역으로 지정된 서계동과 청파동이, 오른쪽에는 재개발이 진행된 만리동이 있다. 주민들은 ″재개발 하나로 동네의 '계급'이 갈라졌다″고 말한다. 박사라 기자.

지난 23일 찾은 서울시 용산구 서계동 골목. 서울역 뒤 ‘노른자 땅’에 위치했지만 주변의 화려한 건물과는 달리 낡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골목길은 1m 남짓으로 비좁고 비탈길에 계단이 많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울역ㆍ남대문ㆍ서계동ㆍ중립동ㆍ청파동 일대는 2017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이 추진돼 약  100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주민 이모(64)씨는 “그 많은 예산을 써놓고 정작 주민 생활이 나아진 게 없다”며 “도시재생사업 때문에 재개발ㆍ재건축이 막혀 오히려 동네가 더 슬럼화가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주민들은 도시재생의 문제로 근본적인 인프라 개선이 턱없이 부족한 점을 들었다. 당초 시는 서계동 일대 재생 목표로 ‘국제적 관광ㆍ문화허브’를 내세웠다. 서울역 공항철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점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낡은 동네 미관을 개선하겠다며 페인트칠을 하고, 서계ㆍ청파언덕 꼭대기에 전망대도 설치했다. 소규모 주민 커뮤니티 시설이나 문화시설도 들어섰다.

쓰레기장 된 전망대…학교선 '빌라거지' 놀림 

서계·청파 언덕에 설치된 전망대. 인근에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 박사라 기자.

서계·청파 언덕에 설치된 전망대. 인근에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 박사라 기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계동의 모습. 한 주민은 ″낙후된 동네 모습을 구경하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박사라 기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계동의 모습. 한 주민은 ″낙후된 동네 모습을 구경하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박사라 기자.

하지만 이날 기자가 찾은 동네에서는 외부 관광객을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관광객이 이용할 만한 식당이나 카페도 찾기 어려웠다. 서울시가 내세운 성과물 중 하나인 전망대는 사실상 쓰레기장이 됐다. 벽화에 대해 한 주민은 “몇 군데 페인트칠 한 곳은 있는데 그걸 말하는 것이냐, 벽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네가 언덕에 위치한 데다, 골목길이 어지럽게 있다보니 외부 인구 유입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한다. 오히려 있던 주민조차 떠나가는 추세다. 용산구 통계에 따르면 도시재생 사업 전인 2017년에 비해 지난달 청파동 인구는 2만 여명에서 1만 9000여 명으로 줄었다.

서계동에서 도시재생 사업이 수년째 이어지는 동안,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둔 만리동은 재개발이 진행되며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서계동의 한 주민은 “동네 애들이 학교에 가면 아파트단지 아이들이 ‘빌라 거지’라면서 멸시를 하고 학부모끼리 어울리지도 않는다”며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못 버티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관광 허브? 있던 주민도 떠난다"

도시재생사업으로 페인트칠과 계단이 정비된 서계동 골목길. 박사라 기자.

도시재생사업으로 페인트칠과 계단이 정비된 서계동 골목길. 박사라 기자.

서계동은 2007년 뉴타운 후보지로 지정되면서 한 때 주민들이 기대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뉴타운 후보지에서 제외되고, 대신 고(故) 박원순 전 시장 시절 도시재생 후보지가 됐다. 윤희화 서계동 공공재개발 준비위원장은 “공공재개발 사업에 지원을 했지만 도시재생구역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탈락했다”며 “재생사업이 오히려 지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역 일대 뿐만 아니다. 도시재생구역 1호였던 창신동을 비롯한 11구역에서는 서울시를 상대로 공공재개발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소송도 냈다. 윤 위원장은 “주민들이 원하는 건 낙후 지역을 어설프게 포장하는 게 아니라 도로를 확장하고, 주차 공간을 넓히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도시재생 예산으로는 대규모 인프라 개선 공사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단 입장이다.

서울시 "아직 체감 어려울 것… 주택도 개량하겠다"

서울시 관계자는 “도시재생은 개개인의 집을 바꾼다기보다 공공사업 위주로 하다보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체감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뉴타운 지정 실패로 지역 주민들 간 갈등이 심해진 상황에서 공동체 활동을 위한 기반 시설을 만들고 각종 사업을 한 것도 ‘눈이 보이지 않는 도시 개선’에 속한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콘크리트 건물이 주는 위압감이나 골목길의 아기자기한 정감이 사라져 가는 데에 아쉬움이 있다”며 도시재생의 긍정적인 면도 언급했다. 다만 도시재생에만 지나치게 역점을 두다보니 ‘주택 참사’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앞으로는 민간 동력도 끌어들이고, 집수리 전문가들을 투입해 실질적인 주택 개량이나 정비 쪽으로 도시 재생을 지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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