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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사고’에 잠 잘 안 자는 아이, 약물·가족중심치료 필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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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호 22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아동기 조증

아동기 조증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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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땅과 나라를 사고 빌딩도 다 사들여서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거예요. 그래서 지구 아니, 우주 대통령이 될 거예요! 달도 사고 화성도 사고 목성도 사고 우주를 다 사서 지배하려고요.” 초등학교 3학년 준서의 소원이다. 부모는 준서가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뭔가를 계속 만들고, 반 친구들과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많아져 아이와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ADHD·반항적 도전 장애와 달라 #“우주 대통령 될 것”등 비현실적 #짜증·불안·우울·산만증 드러내 #기분안정제 등 약물요법 우선 #가족도 치료에 동참해야 효과적

“이런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나는 준서의 태도를 살피며 부모에게 물었다. 준서는 산만하게 진료실 내부를 두리번거렸고 표정은 마치 실실 웃는 것 같았다.

부모, 빨리 온 사춘기로 잘못 여기기도

“3학년 올라와서 갑자기 애가 달라졌어요. 원래 좀 부산스럽긴 했지만 화를 내거나 누구와 다투는 일은 없었거든요. 잠을 자라고 해도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며 종이를 접고 그 위에 뭔가를 계속 적어요. 나중에 보면 무엇을 만든 건지 도대체 모를 정도의 것들입니다. 종이에는 지구, 대통령, 우주 같은 단어들이 맥락 없이 잔뜩 쓰여있고요, 그래도 학교에서 별 문제가 없었다면 병원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담임선생님께서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하시네요.” 준서 엄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실은 준서가 학교 입학하자마자 시행한 학생정서·행동특성 검사에서 ‘주의를 요함’ 소견이 나와서 동네 소아정신과를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진단받고 몇 개월간 약물치료를 했었는데 아이가 예민해지고 짜증이 늘어서 중단했었습니다.”

“가족 중에 감정기복이 심하다거나 우울증이 있으신 분은 없으신가요?” 내가 물었다.

“준서 이모가 양극성 장애 치료 중이예요. 여러 차례 입원도 했습니다. 아, 그리고 애 엄마도 준서 낳고 산후우울증으로 심하게 고생했습니다.” 준서 아빠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면담 내내 준서는 말이 많고 빨랐다. 중간에 잘 알아듣지 못해 자주 중단시켜야 했다.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준서가 그린 나무는 A4 용지를 꽉 채우다 못해 결국 윗부분이 모자랄 정도로 넘쳤다. 나무에 색칠하고 싶다며 색연필을 달라고 했다. 그냥 연필그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자 “피이, 치사해”라며 준서가 투덜거렸다. 약 20분 동안의 면담이 그리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준서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큰 소득이 있었다.

“준서는 소원이 뭐야? 세 가지 정도 이야기해 볼까?”라고 내가 물었을 때, 서두에 기술한 것과 같은 답변이 나온 것이다. “아, 준서가 우주 대통령이 돼서 우주를 지배하고 싶구나”라고 응수하자 아이는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될.거.라.구.요!”라며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주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지?”라고 내가 물었다. 준서는 “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냥 되는 거죠”라고 답했다.

아동기 조증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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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부터 준서가 초등학교 입학 직후 산만했었고 최근 학교에서 친구와 자주 다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ADHD 진단을 우선적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가족력을 파악하고 준서와 면담을 마친 후에 준서가 ‘양극성 장애의 제1형, 조증삽화(이하 조증)’ 진단이 가능한 상태라고 판단했다. 준서가 소원으로 말한 내용은 전형적인 ‘과대사고(grandiosity)’다.

과대사고란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을 뒷받침할 근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 과장되고 비현실적 감각을 지닌 경우를 일컫는다. 이런 경우 자신의 신념을 말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그것을 알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합리적 과정이나 이유를 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준서가 “그냥 되는 거죠”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이러한 ‘과대사고’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동기 조증은 ADHD나 불안장애, 반항적 도전 장애와 감별이 매우 어려운데 ‘과대사고’는 조증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구별되는 증상이 수면 문제다. 아동기 조증의 경우 잠을 자려는 욕구가 줄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하려 한다. 반면 ADHD와 반항적 도전 장애는 수면 욕구가 줄어드는 증상은 없다.

마지막으로 감별할 요소는 가족력 여부이다. 준서 이모가 양극성 장애로 치료 중이고 엄마도 산후우울증을 겪었다는 사실은 준서의 진단에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특히, 사춘기 이전 발병하는 경우가 사춘기 이후에 발병하는 조증에 비해 가족력을 지닐 확률이 3배 높다.

아동기 조증은 100명당 1명 이내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사춘기 이전 아동에서는 발달학적 문제와 여러 증상이 공존해 진단이 까다롭다. 어릴수록 청소년이나 성인기 양극성 장애와는 달리 짜증과 불안, 우울, 산만증 등이 섞여서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은 자녀가 갑자기 반항하고 화를 자주 내는 모습을 치료받아야 할 증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료실에서 많은 부모가 자녀가 자주 대들고 짜증 내는 모습을 보일 때 “선생님, 우리 아이가 벌써 사춘기가 왔는지 요새 반항을 많이 하네요”라고 말하곤 한다.

적절한 칭찬·훈육 학습 등 4단계 치료

준서 부모도 처음에는 아이가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사춘기가 빨리 와서 화를 자주 내는 것으로만 여겼다. 모든 정신장애가 그러하듯 양극성 장애와 조증의 원인도 명확하지 않다. 유전적 요소가 약 80% 정도 차지하고 그로 인해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이 초래되어 기분 조절에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설명한다. 준서 엄마는 유전적 요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모계의 기분장애 병력이 준서의 발병에 기여했다고 여기고 죄책감에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부모가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은 경우라도 자녀에게 동일한 병이 발생할 확률은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즉, 유전적 요소 이외에도 다양한 환경적, 심리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하여 발병한다는 것이다.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준서 아빠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준서와 같이 어린시절 조증이 발병한 경우 어떤 치료가 최선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준서는 우선적으로 기분안정제를 복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가족도 함께 치료에 동참하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부모는 준서가 ADHD 치료 약물 복용 이후 증상이 악화됐던 경험으로 인해 약물치료를 주저하는 듯했으나 준서 이모의 치료과정을 상기하며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 발병한 양극성 장애 치료를 위해는 성인과는 달리 가족중심치료(Family-Focused Treatment)가 필수적이다. 가족 내의 갈등과 문제들이 아이 증상의 촉발, 악화 그리고 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족중심치료는 크게 4개의 단계로 구성되어있다.

첫째는 ‘약속 단계(engagement phase)’로서 아이와 부모에게 치료의 진행과정과 구성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논하는 단계이다.

둘째는 ‘정신교육 단계 (psycho-educational phase)’로서 병의 특징과 원인, 치료, 예후 등에 대해 설명하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에서는 ‘의사소통 증진 훈련(communication enhancement training)’을 통해 자녀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말하고 자녀의 말을 어떻게 경청해야 하는지를 부모가 배운다. 즉, 이 과정에서 부모는 자녀를 적절히 칭찬하고 훈육하는 방법을 제대로 학습한다.

넷째 단계에서는 ‘문제해결기술 훈련(problem- solving skills training)’을 시행한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을 파악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아이와 부모가 실제 생활에서 행동에 옮기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다.

준서와 부모는 가족중심치료를 2주 간격으로 약 10개월간 꾸준히 받았다. 그 과정을 통해 부모는 아이의 기질적 특성과 병의 증상을 구별하는 법과 조증 발현의 초기 신호를 인식하고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준서가 더는 병원을 찾지 않은 지 수년이 흘렀다. 지금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준서에게 어떤 꿈이 생겼을지 무척 궁금하다.

소아 양극성 장애 환자 위한 가족중심치료의 목표

1 조증과 우울삽화에 대한 경험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도록 돕는다
2 증상의 초기 신호를 파악해서 더 진전되지 않게 만들 계획을 세우도록 돕는다
3 환자의 증상 조절을 위해서는 기분안정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시킨다
4 기질적 특성에서 비롯된 모습과 병의 증상의 차이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5 기분 변화를 촉발시키는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에 대처하도록 돕는다
6 재발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회복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 가정환경 조성을 돕는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가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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