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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명함 한장으로 잡았다…‘韓인재 中 빼돌린’ 브로커 덜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출국이 안 됩니다.”
2019년 8월 인천국제공항 해외 출국장에서 항공권을 들고 출국하려던 장광재(41ㆍ가명)씨는 게이트에서 멈춰야 했다. 잠시 후 공항에 있던 장씨에게 경찰관들이 다가왔다. 신체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한 경찰은 그 자리에서 장씨가 들고 있던 노트북을 압수했다.

출국 직전 붙잡힌 ‘기술 유출 브로커’

장씨를 막아선 이들은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현 안보수사대) 수사관들. 국내 기업의 산업기술 유출 사건을 수사하던 수사관들은 장씨를 용의자로 특정했다. 그에 대한 압수수색을 준비하던 중 해외로 도피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긴급 출국금지 조치를 한 상황이었다. 유출 혐의를 받는 한 연구원에게서 장씨 회사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발견한 것이 실마리가 됐다.

9일 인천국제공항 전광판에 영국발 도착 항공편이 표시돼 있다. 뉴스1

9일 인천국제공항 전광판에 영국발 도착 항공편이 표시돼 있다. 뉴스1

경찰이 확보한 장씨의 노트북에선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에서 근무하던 연구원 수십명의 인적사항이 나왔다. 중국의 한 동종업체에 취업을 연결해 주기 위한 정보였다. 2013년 11월부터 2018년 9월까지, 그가 중국으로 넘어가게 한 국내 기업 연구원은 43명. ‘잘 나가는’ 헤드헌터로 보인 장씨의 실체는 ‘기술 유출 브로커’라는 게 수사기관의 판단이다.

장씨는 여직원 최모(27)씨를 두고 한국의 ‘인재’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둘은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인 BOE 관계자와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경찰은 장씨와 최씨를 직업안정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 관계자는 “해외로 출국했으면 검거가 어려웠다. 드라마틱한 수사였다”고 했다.

이직 연구원 연봉의 20%가 수수료

1년 넘는 수사와 보강 조사를 거쳐 수원지검 방위사업ㆍ산업기술범죄형사부(부장 이춘)는 지난달 29일 두 사람을 불구속기소 했다. 헤드헌팅 업체 대표 장씨와 직원 최씨는 국내 기업 연구원 43명을 중국의 동종업체로 이직하도록 도운 뒤 그 대가로 8억 39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최근 불법 수익을 환수하기 위한 추징보전을 법원에 청구했다.

연구원 한 명을 중국에 보낼 때마다 책정 연봉의 20%를 알선 수수료로 받았다. 특히 OLED 관련 연구원에게 주로 접근했다. 중국 이직자 중에는 부장급 간부도 포함됐다. 국내보다 2~3배 높아지는 연봉, 화려한 업무환경 등을 미끼로 국내 대기업 연구원들에게 접근했다.

070 인터넷 전화로 추적 피해

이직을 결심한 연구원들에겐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를 제공하고 해외 메일을 개설해줬다.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 산업기술을 취급하는 연구원은 동종업체 이직이 금지된 만큼 해외에 만들어진 ‘페이퍼컴퍼니’로 옮길 수 있게 했다.

연도별 산업기술·영업비밀 해외유출 적발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연도별 산업기술·영업비밀 해외유출 적발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산업기술과 영업비밀 해외 유출은 매년 10건 이상 적발되고 있다.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기술 및 영업비밀의 해외유출 적발 건수는 17건이다. 산업기술 유출 범죄의 은밀성으로 볼 때 실제 기술유출은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유출 기술 3분의 2가 중국행  

적발된 산업기술 유출 사례 중 정밀기계와 전자·전기 업종에서 이뤄진 해외 기술유출은 전체의 43%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산업 중 경쟁력이 있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서의 기술유출 시도가 많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국정원에 따르면 유출된 산업기술 중 3분의 2는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은 몇 년 전부터 OLED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스마트폰에 주로 쓰이는 중소형 OLED 시장에서 5.3%(2018년)였던 중국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13.9%까지 올라갔다. 같은 기간 삼성·LG가 대표하는 한국의 시장점유율은 2018년 94.4%에서 88.9%(2019년), 86.1%(2020년)로 떨어졌다.

업종별 산업기술·영업비밀 해외유출 적발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업종별 산업기술·영업비밀 해외유출 적발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앞서 LCD 패널의 경우 2017년 글로벌 시장 점유율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앞선 중국은 지난해엔 전 세계 LCD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빠르게 성장한 전례가 있다. 장씨와 최씨도 경기 수원에 자리를 잡고 OLED 관련 산업 연구원의 이직을 알선해왔다. 삼성디스플레이의 본사가 수원에 있다.

기술 유출 사건에 ‘직업안정법 위반’?

재판에 넘겨진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직업안정법 위반. 유료직업소개 사업을 하면서도 고용노동부에 등록하지 않았을 때 처벌하는 혐의다. 경찰과 검찰은 장씨 등에게 산업기술보호법 및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현실에 막혔다. 현행법상 연구원의 자료 반출 행위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인력 알선 행위만으로는 산업기술유출 공범으로 처벌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장씨는 경찰과 검찰에서 해외 이직을 알선한 혐의는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회사의 기술을 빼내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산업기술보호법은 ‘산업기술 비밀유지 의무가 있는 자가 부정한 이익을 얻고 기술을 유출하거나 사용’하면 처벌한다고 돼 있다.

김창룡 경찰청장(왼쪽)이 지난달 15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간담회에서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엄정한 수사 및 예방 활동 강화 등을 경찰에 요청했다. 뉴스1

김창룡 경찰청장(왼쪽)이 지난달 15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간담회에서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엄정한 수사 및 예방 활동 강화 등을 경찰에 요청했다. 뉴스1

“사람이 유출 핵심인데…”

기술 해외 유출이 심각해지면서 지난해 11월 황운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가 핵심기술의 해외유출시 법정형을 현행 3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10년 이상으로 높이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형량을 높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손승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점차 국가ㆍ기업 간 첨단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기술은 사람에 의해서 빠져나가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국내 인력을 비싸게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는 브로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이어 “기술유출 가능성을 예견하고 영리를 취했다는 것만으로 처벌이 가능하도록 법을 명확하게 개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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