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고 시간 없다 … 카피약에만 매달려

중앙일보

입력

미 할리우드 뿐 아니라 제약업계도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쓴다. 연간 전세계적으로 1억 달러(약 960억원) 이상 팔리는 '대박' 의약품을 칭한다. 2002년부터 해마다 국내에서 1000억원 이상 팔린 한국화이자의 고혈압치료제 '노바스크'를 예로 들 수 있다.

1999년 9월 SK케미칼의'선플라주'를 시작으로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등록된 신약은 LG생명과학의 팩티브를 포함해 모두 열 건이다. 불행하게 이 중 블록버스터는 나오지 않았다. 지난해 열 건의 매출을 다 합해야 1000억원에 미치지 못한다. 국내 신약 가운데 유일하게 미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팩티브도 판매실적이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외자유치를 포함해 5000억원 넘는 개발비를 들여 미 시장에 진출한 팩티브의 부진을 보며 국내 제약업계에 '신약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피터 마그 한국노바티스 사장은 "신약후보 물질이 제품화에 성공하는 비율은 11%에 불과할 정도로 리스크(위험)가 크다"며 "신약 하나 개발하는 데 보통 10년 이상 7000억원 넘는 경비가 든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거대 다국적 제약사들만 신약개발에 뛰어들 수 있다는 비관론이 국내에 팽배하다. 국내 1위 제약사와 세계 1위 제약사간의 매출 격차는 1995년 38배에서 지난해 92배로 갈수록 벌어지는 추세다.

<그래픽 참조>

움츠린 국내 분위기는'제너릭'열풍을 낳았다. 오리지널 신약 가운데 특허 만료된 것을 추가로 연구 개발해 내놓는 풍조를 뜻한다. 1980년대 연 매출 100억원에 불과하던 군소 제약회사에서, 각종 제너릭 약품 출시로 업계 3위 제약사로 뛰어오른 한미약품이 이 방면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다. 다국적 제약사의 처방약 시장점유율이 2004년 27.6%로 줄곧 늘다가 지난해 27.3%로 주춤한 이유가 토종회사들의'제너릭 공세'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심지어 팩티브를 내놓은 LG생명과학 조차 제너릭 시장을 엿보고 있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팩티브 개발 및 제품화 전 과정에 깊숙이 간여한 남두현 박사(당시 공정개발그룹 상무)를 자문역으로 사실상 퇴진시킨 대신 제너릭이 전문인 박사 두 명을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1월에는 제너릭 사업 비중을 높이는 프로젝트 조정을 단행해 20명 안팎의 연구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이 때 회사를 떠난 한 연구원은 "팩티브 이후 뚜렷한 신약 후보물질을 확보하지 못하자 회사가 생존 차원에서 내린 결단으로 보인다"고 아쉬워했다. LG생명과학과 함께 자본력 면에서 신약개발 능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CJ 또한 지난해 여름 신약개발에서 공식적으로 손을 떼면서 40여명의 연구원이 나갔다. 대신 제너릭 연구원 20여명을 채용했다.

제너릭 열풍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LG경제연구원의 고은지 책임연구원은 "제너릭이 각광 받으면서 국내 제약업계의 신약개발 열기가 사그러들었다"며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 신약개발 능력이 부족한 회사는 적잖은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FTA 체결과 함께 미국 제약사들이 국내 약값을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또 제너릭 약품 판매허가를 받을 때 오리지날 제품의 임상데이터를 그냥 첨부해 식약청에 제출하는 관행을 미국 측이 문제삼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제너릭 약품에 대한 임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제너릭의 원가가 올라갈 수 있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호주에서는 오리지날 약품 처방을 늘리라는 미국의 요구가 지난해 1월 관철돼 환자들의 의약품 비용이 늘고 있다. 고은지 연구원은 "한.미 FTA 체결 이전에 국내 제약사들이 웬만한 몸집과 역량을 갖춰야 한다"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국내 제약업계의 영세성을 해결하려면 외국보다 비싼 제너릭 약값을 보장해 준 약값 정책을 개선해 제약사간 인수합병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 많은 제너릭 시장 자체의 성장성 조차 의문시하는 시각도 있다. 보건산업진흥원 이상원 BT 전략팀장은 "그동안 물질특허 제도의 틈새를 노린 제너릭 약품이 많이 나왔지만 근래 다국적 제약사들이 오리지날 신약의 특허범위를 넓게 잡는 추세가 확연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인도의 값싼 제너릭 약품까지 국내에 유입되면 설땅이 더욱 좁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