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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노마드의 새로운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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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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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시대 이전의 고전적 노마드(nomad, 유목민)와 달리 디지털 노마드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 등장한 새로운 종족이다. 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특정 장소에 매이지 않고 원격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남의 일 같았는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재택근무·원격근무를 겪어보니 그게 아니다. 프랑스 석학 자크 아탈리는 이런 현실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그가 1998년 펴낸 미래전망서 『21세기 사전』에서 노마드에 대한 설명은 “다음 세기(21세기)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새로운 노마드는 21세기 미국에도 있다. 집 없이, 아니 자동차를 바퀴 달린 집 삼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디지털 노마드처럼 원격으로 일하는 대신 일자리를 찾아 차를 몰고 이동한다. 연말에 밀려드는 상품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임시직 노동자를 대거 고용하는 아마존이나, 여름 시즌 캠핑장 관리자를 단기적으로 고용하는 국립공원 같은 곳이 그런 일자리다. 이런 노마드가 급증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이들을 다년간 취재한 미국 기자 제시카 브루더가 쓴 『노마드랜드』 따르면, 그 상당수가 은퇴 연령대의 나이 든 사람들이다.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 집세를 감당할 수 없거나, 경제위기로 중산층에서 추락한 이들이다.

프랜시스 맥도먼드 주연의 영화 ‘노매드랜드’.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프랜시스 맥도먼드 주연의 영화 ‘노매드랜드’.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노매드랜드’는 이처럼 기자가 쓴 르포를 원작 삼았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원작에 없는 중년 여성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정을 따라 인생의 희로애락이 곳곳에 배어나는 서정적 극영화다. 여기에 그려지는 노마드는 그저 인생의 벼랑에 내몰린 이들이 아니다. 상대에게 도움을 줄 때면 당당히  나에게도 도움을 달라고 요구하는 독립적인 사람들이자, 길 위에서 생활하는 노하우를 교환하고 자연 친화적 철학을 공유하는 느슨한 공동체이기도 하다. 아탈리가 21세기의 핵심 키워드로 노마드를 꼽으면서 강조한 것도 이같은 박애나 타인에 대한 환대 등의 덕목이다. 그에 따르면 노마드는 방랑이나 유랑이 아니라 “함께 나눈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퀴 달린 집은 공교롭게도 영화 ‘미나리’에도 나온다. 한눈에 봐도 볼품은 없지만, 한국계 이민자인 주인공 가족이 새로운 정착지 아칸소에서 살아가는 기반이 되는 소중한 집이다. 이민자와 토착민, 유목민과 정착민은 지구촌 곳곳에서 그 경계가 뒤섞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서로에 대한 강한 배척과 경계심도 불거진다. 이런 세상에서 올해 아카데미상은 한국 이민자의 이야기 ‘미나리’의 한국 배우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을, 미국 노마드의 이야기 ‘노매드랜드’의 중국 출신 감독 클로이 자오에게 감독상을 안겼다. 각각의 영화는 물론이고 그 연기와 연출도 그럴테지만, 아카데미의 이런 선택이야말로 두고두고 빛날 대목이다.

이후남 문화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