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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머니 리그, 유럽축구 정신 ‘공생’ 흔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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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EPL 아스널의 팬이 지난 19일 런던에서 수퍼 리그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EPL 아스널의 팬이 지난 19일 런던에서 수퍼 리그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코로나19 팬데믹 장기화로 인해 축구 산업은 고사 직전이다. 이대로면 2~3년 이내에 공멸이다. 자생력을 갖춘 리그의 출범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플로렌티노 페레스 레알 마드리드 회장 겸 유럽 수퍼리그 초대 회장)

‘유러피언 수퍼리그’ 후폭풍 #구단들 명분은 “코로나 자금난 해소” #JP모건 7조 투자, 엘리트주의 지향 #미국 메이저리그식 운영도 반감 한몫 #유럽 정치권 “연대·스포츠 가치 위협”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전망 우세

“유러피언 수퍼리그는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일부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놀이터다. 주변에 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축구계가 순진했던 것 같다. 남은 건 응징뿐이다.” (알렉산더 세페린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일까. 또는 집단 이기주의의 노골적인 표출일까. 유럽 최상위 명문 축구클럽 12개 팀이 19일 밝힌 유러피언 수퍼리그(이하 수퍼리그) 출범 소식은 축구를 통해 유럽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온 연대와 평등의 가치까지 뒤흔든 핫 이슈다.

유럽 3대 축구리그의 간판 클럽 대부분이 수퍼리그에 참여했다. 수퍼리그는 향후 15개 팀으로 규모를 키운 뒤 매 시즌 5개 초청팀을 추가해 20개 팀 체제로 시즌을 치를 예정이다.

유러피언 수퍼리그

유러피언 수퍼리그

수퍼리그는 북미 프로스포츠식 리그 운영 모델을 채택했다. 승강제 없는 폐쇄형 구조, 전체 참가팀을 양대 리그 형태로 나눠 치르는 정규 시즌, 이후 별도의 포스트 시즌을 통해 최종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까지 영락없는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MLB)나 미국 프로농구(NBA)의 형태다. 승강제에 기반한 단일리그 시스템을 한 세기 넘게 유지한 유럽 축구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고려하면 미국식 프로 스포츠를 지향하는 수퍼리그의 행보는 파격적이다.

최상위 리그를 새로 만드는 표면적인 이유는 자금난이다. 수퍼리그에 참가하는 12개 클럽이 짊어진 부채 총액은 50억 유로(6조7000억원)에 이른다. 팀당 평균 5600억원.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며 경기 수와 관중이 급감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와 관련해 수퍼리그는 천문학적인 지원금을 미끼로 참가팀을 끌어모았다. 미국의 글로벌 투자회사 JP모건이 50억 유로(약 7조원) 투자를 약속했고, 8월 개막 예정인 첫 시즌에만 중계권료 포함, 135억 유로(약 18조원)의 ‘돈 폭탄’이 쏟아부어진다.

수퍼리그 창설의 실질적인 지향점은 리그 운영의 전권을 참가 구단들이 직접 거머쥐는 데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UEFA 등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는 게 목표다.

‘소수 정예 엘리트 리그’를 지향하는 수퍼리그에 대해 세계 축구계는 일제히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은 “(수퍼리그 창설은) 유럽 축구 역사에서 멀어지겠다는 뜻”이라고 불쾌감을 표했다. FIFA는 UEFA를 포함한 6개 대륙연맹과 공동 대응을 천명했다.

유럽 축구 클럽 채무 상위 10걸

유럽 축구 클럽 채무 상위 10걸

‘축구 종주국’ 영국 등 유럽의 정치권도 격앙된 반응을 쏟아냈다. 올리버 다우든 영국 문화부 장관은 20일 의회에 보낸 성명서에서 “(수퍼리그 출범을 막기 위해) 축구 클럽의 경영 구조 개혁부터 경쟁 관련 법률까지 모든 옵션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연대와 스포츠의 가치를 위협한다”며 “프랑스 구단들이 동참하지 않은 걸 환영한다”고 밝혔다. 포르투갈 정부도 “수퍼리그에 엄중히 반대한다. 축구를 넘어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리그를 보전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수퍼리그에 대해 유럽이 한목소리로 대응하는 건 축구에 녹아 있는 평등과 공생의 가치 때문이다. 체육철학자인 김정효 서울대 교수는 “유럽에서 축구는 삶과 불가분이다. ‘동일한 규칙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유럽 사회의 보편 가치를 구현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며 “돈을 앞세워 축구계에 신개념 계급 제도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수퍼리그는 앞으로도 적잖은 저항과 마주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수퍼리그 출범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토트넘을 비롯한 몇몇 구단은 벌써 수퍼리그 참여 수익을 예산에 반영해 활용 중이다. 김도균 경희대 체육대학원 교수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려는 유럽 축구 빅 클럽들의 이기적인 움직임과 별개로 스포츠와 자본이 결합해 더 큰 무대를 만드는 현상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며 “소비자와 미디어 입장에서도 결국엔 더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빅 매치 위주로 관심이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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