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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비비안 리 닮은 첫사랑, 그녀 약혼자와 담판짓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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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7〉 사랑 때문에 대학 중퇴

1 조영남씨가 옛 사진들을 콜라주 식으로 오려 붙인 작품. 오른쪽 노트를 끼고 서 있는 모습과 아래 누워 있는 모습이 한양음대 시절이다. 맨 왼쪽은 서울음대 시절 오페라 ‘쟌니 스키키’ 주연을 맡아 분장한 모습. 가운데는 강문고등학교(지금의 용문고등학교) 졸업 사진. [사진 조영남]

1 조영남씨가 옛 사진들을 콜라주 식으로 오려 붙인 작품. 오른쪽 노트를 끼고 서 있는 모습과 아래 누워 있는 모습이 한양음대 시절이다. 맨 왼쪽은 서울음대 시절 오페라 ‘쟌니 스키키’ 주연을 맡아 분장한 모습. 가운데는 강문고등학교(지금의 용문고등학교) 졸업 사진. [사진 조영남]

미8군 쇼단의 가수가 되어 첫 월급을 받고 보니 더이상 음대에서 공부해야 할 건더기가 없어 보였던 거다. 때려치웠다.

한양음대 2학년 때 머플러 그녀 #비비안 리 빼닮아 상사병에 걸려 #합창 수업 때 장군 역 맡아 환심 사 #“노래 잘 불러” 꿈 같은 연애 성공 #물지게 지고 남산자락서 함께 노래 #방학 땐 시골집 찾아와 농사 돕기도

나는 3년 전쯤에 잘 다니던 한양음대도 2년 때 중퇴했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서울음대는 돈 때문에 그만두게 된 것이고, 한양음대 때는 사랑 때문에 때려치운 것이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일류대 중퇴생이라는 점에 늘 고무가 되기는 했지만 내 경우 한양음대 중퇴의 원인이 오로지 사랑 때문이었기 때문에 나는 비즈니스보다 사랑 우선주의를 택했다는 점에 훨씬 우쭐댈 수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사랑 우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왕십리에 있는 한양음대 2학년 1학기 개학 첫날. 온통 교문에서부터 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구름떼처럼 올라가는 학생들 틈에 나는 어느 여학생의 뒷모습에 내 눈길을 꽂게 된다. 대부분이 남학생들 틈에 섞인 여학생이라는 점과 초록색 머플러를 썼다는 점, 그리고 구름 위를 걷는 듯 미끄러지는 사뿐사뿐한 걸음걸이.

지난 1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머플러를 쓴 학생을 본 적이 없다. 마치 훗날 이만희 감독의 영화 ‘만추’(1966년)의 주인공 같았다.

나는 덤덤하게 영화과 학생쯤 되겠지 싶었는데 어라! 우리 음대 방향으로 걸음을 트는 것이었다.

개학 첫날이라 여러 신입생이 엉켜 분주하게 돌아가는 틈에 나는 그녀가 우리 음대 신입생이라는 것과 이름이 오명자라는 걸 알게 된다. 물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흘깃흘깃 살펴봤지만 와우! 비비안 리와 소피 마르소의 짬뽕이었다.

내가 왜 그럴까. 평생 두 명의 누나와 늘 다니던 교회에서 수없이 여학생을 봐왔는데 왜 하루 종일, 그다음 날도 오명자의 모습만 떠오르고 지워지질 않는가. 정말 지독한 병에 걸린 것이었다. 잠들기 전 그녀 생각에 난생처음 몸을 뒤척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녀 약혼자와 담판 땐 다리 벌벌 떨어

상사병에 걸렸음에도 아닌 척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했는데 사랑의 신은 나를 버리진 않은 것 같았다. 음대에는 합창이라는 교과 과목이 있고 이 시간엔 기악과, 성악과, 작곡과 전교생이 큰 강당에서 합창 수업을 받는 거다.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정재동 선생이 학교 기념식인가를 위한 드라마틱 칸타타를 연습하는데 주인공인 장군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잘 있거라 내 고향아”를 불러야 하는 장면이 나오게 되어 있다. 우리 학교엔 기라성 같은 성악과 선배들이 있는데 정재동 선생이 하필 나한테 “조영남, 네가 한 번 불러봐!” 하는 것이었다. 아! 드디어 기회가 오는구나 하며 필사적으로 솔로를 해냈다. 이래선 안 되는데 “독자 제위님! 전 그때 정말 노래를 잘 불렀던 것 같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잘했다는 격려를 받으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병훈이, 똥건호, 이정호 등과 6층 꼭대기 피아노실로 몰려와 평소처럼 시시덕대고 있는데 “똑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평이나 될까 한 좁은 공간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고 문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유리창이 있어 밖에 모습을 내다볼 수가 있었는데 헐! 오명자가 오묘한 메조소프라노의 음색으로 “조영남씨 교무실에서 조상현 선생님이 부르십니다” 하고 돌아서 갔다. 나는 속으로 ‘왜 이 시간에 내 성악 담당 교수님이 날 찾으시지?’ 하며 책가방을 챙겨 들고 교무실이 있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는데 갑자기 나를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명자였다.

“미안해요. 제가 거짓말했어요. 합창시간에 너무 노래를 잘 불러서 그 얘기를 해주려고 그랬어요.”

2 오명자씨 사진을 활용한 1987년 작 ‘나의 첫 사랑’. [사진 조영남]

2 오명자씨 사진을 활용한 1987년 작 ‘나의 첫 사랑’. [사진 조영남]

그때부터 우리의 꿈만 같은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한양대 뒷문으로 나가면 광나루 가는 긴 다리를 건너 하염없이 강둑이 펼쳐져 있었는데 우리는 강둑에 앉아 데이트를 즐겼다. 유독 그해에는 봄비가 매일처럼 내려 그녀가 펼쳐 든 우산을 보며 짐작했다. 우산대가 은색으로 번쩍대는 게 벌써 귀티가 펄펄 났다. 귀가시간이 여섯시 근처로 차츰 알게 됐지만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로 몸이 허약해 2년간 병원생활을 하다가 담당 의사와 약혼을 하고 몸이 건강해져서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었다. 명동 한복판에 사는데 왜 일정한 시간에 집엘 가야 하는지도 알게 됐고 집에 가선 약혼자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치열하게 만났다. 병훈이, 똥건호를 비롯 남자 친구 녀석들은 모른 체 넘어가 주었지만 동기생 내 여자아이들은 생난리였다. 내가 불여우에 홀렸다는 것이다. 집에까지 찾아와 내 큰 누나한테 고자질하고 불여우를 떼어 놔야 한다고 쑤석이는 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성격대로 하는 타입이다. 내가 좋거나 재미있으면 끝까지 가는 게 내 스타일이었다.

몇 년 전 나는 큰 누나(누나가 살아 계실 때)와 이런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야! 나 이따금씩 오명자 생각이 나. 너 내가 명자한테서 온 편지 한 번 읽었다고 내가 얼마나 너한테 혼났는 줄 알아?”

내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자 큰 누나는 계속 낄낄거리며 “야! 우리 집에 걔가 편지를 자꾸자꾸 보내길래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을까 하고 딱 한 번 뜯어 보고 너한테 줬는데 내가 얼마나 너한테 혼났는지 모르지? 네가 펑펑 울면서 난리더라. 남의 편지를 도둑질해서 뜯어봤다고 길길이 뛰는 거야” 라고 했다.

잠깐!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내가 펑펑 울었다는 대목이다. 그것도 편지 한 번 뜯어봤다고. 내가 또 물었다.

“정말 내가 펑펑 소리내어 울었다구? 눈물 흘리면서?”

“엉! 목놓아 울었어야.”

“편지 내용이 뭐였어?”

“내용 없었어. 그냥 보고 싶다는 얘기 같은 거였어.”

나는 평소에 단 한 번 이성 문제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고 은근히 남성성을 자랑해 왔었다. 난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큰 누나나 작은 누나가 죽었을 때도 눈물이 안 나왔고 다 커서도 여자와 헤어질 때도 눈물이 안 나서 그랬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는 큰 누나의 증언에서 드러났다. 나는 울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경우 펑펑 울었던 사람이다.

그때 나는 큰 누나 집에 얹혀살 때였다. 후암동 종점에서 내려 여러 계단을 거쳐 꼭대기 동네 판잣집에 살았는데 여름만 되면 반드시 물난리를 겪곤 했다. 동네엔 공동수도가 딱 한 군데라서 그 물을 받으려면 물통 행렬의 끝에 갖다 놓아야 한다. 그때 나는 우리 집 물 담당관이었다. 나는 물론 내 나름의 특단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는데 특히 오명자가 집에 오는 날이면 물지게를 지고 남산 위로 물줄기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곳에 잘만 찾으면 바위틈이나 잎새에서 떨어지는 “똑똑똑”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그 밑에 물동이를 밀어 넣으면 두 통의 물통이 찰 때까지는 우리의 자유 시간이다. 거기엔 하늘도 있고 바람도, 석양도 있고 별이며, 은하수도 있었다. 윤동주가 좋아했던 것들이 죄다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물통이 찰 때까지 우리가 아는 노래를 몽땅 부르곤 했다.

그해 여름방학에는 간첩 요원처럼 오명자가 몰래 우리 시골집에 며칠씩 다녀갔다.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지, 작은 누나, 내 동생 영수는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이런 촌구석엘 올 수가 있을까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명자는 내가 하는 일을 다 따라 했다. 감자, 고구마밭에 똥거름을 퍼서 뿌리는 일도 도왔고 꽁보리밥에 마늘종을 막 된장에 찍어 먹는 일도 다 따라 했다.

교무처장 “장학생이 남의 가정 파괴하나”

가을학기가 되자 오명자와 조영남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무성해졌다. 오명자의 약혼자가 나를 찾아와 담판을 낸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나는 한편 모든 상황에 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교무처장이건 오명자 아버지건 오빠건 약혼자건 덤빌 테면 덤벼봐라. 다 상대해주겠다. 오명자가 내 편인 이상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 드디어 D데이가 왔다. 약혼자가 아래층 공터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담판을 짓자는 행동이었다. 나는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6층 건물이었는데도 그때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계단이 많아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다.

나는 천만다행스럽게 결정적인 순간에 차분해지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런 일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종종 생기는 증상이다. 침착해야 한다. 화내면 진다. 1층이었다. 저쪽에 깡마른 한 사람이 서 있다. 오명자의 약혼자다. 나는 영화 ‘하이눈’에 나오는 게리 쿠퍼처럼 걸어가 먼저 낮은 바위에 앉았다. 앉는 순간, 어? 내 양다리가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다. 나는 양팔로 지그시 눌렀지만 상하운동은 멈추질 않았다. 한 번 더 힘을 주며 나의 탁탁탁 떨고 있는 무릎을 강하게 눌렀다. 어! 그런데 누르면 누를수록 빌어먹을 나의 양쪽 발은 타타타 구두 뒤축 바닥을 치는 소리만 요란했다. 김국환의 ‘타타타’는 저리가라였다. 서 있던 오명자의 약혼자는 앉자마자 벌벌 떠는 측은한 모습을 보다 말없이 돌아섰음에 틀림없다.

교무처장이 나를 불렀다. 전액 장학생이 그렇게 남의 가정을 파괴하면 어쩌냐. 당장 중지하고 잘못을 빌어라. 학교냐. 오명자냐. 다 좋았다. 그러나 ‘전액 장학생’이라는 어휘가 나는 심하게 거슬렸다. 그래서 그럼 학교를 포기하겠습니다. 한양대학을 때려치운 내력은 이러했다. 학교와 사랑 중에 겁 없이 사랑을 택한 것이다. 서울음대에 들어가니 돈 많은 부잣집 딸들이 더 많았다. 나는 오명자를 내가 좋아했던 성악과 선배에게 소개, 둘은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나중에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오명자의 친동생으로부터 언니는 이혼하고 외국인과 재혼해서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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