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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살아남는 게 승자” 조선과 일본 사이 절묘한 실리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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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여덟 얼굴’의 대마도

일본 대마도에 있는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의 막부(幕府) 장군에게 파견한 외교사절을 가리킨다. 대마도주가 조선 정부와 일본 막부의 연락 역할을 했다. [사진 한명기]

일본 대마도에 있는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의 막부(幕府) 장군에게 파견한 외교사절을 가리킨다. 대마도주가 조선 정부와 일본 막부의 연락 역할을 했다. [사진 한명기]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다. 왜란 이후 조선 사람이 가장 증오한 존재는 물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였다. 그런데 조선이 히데요시 못지않게 혐오한 대상이 있었다. 바로 대마도(對馬島)다. 왜란 이후 조선 신료 중에는 대마도를 정벌해서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산 부족해 조선에 적극적 구애 #임진왜란 때는 왜군 선봉장 나서 #쇼군 국서 위조, 조선과 국교 재개 #미·중의 강한 압박, 우리의 길은…

일본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대마도는 오지인 데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섬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덮여 있고 토질마저 척박하여 농업 생산은 몹시 빈약했다. 쌀을 비롯한 생필품을 자급할 수 없었던 대마도인은 일찍부터 가까운 조선에 손을 벌렸다. 교역을 하고 있던 와중에도 조선은 물론 중국 연해까지 나아가 왜구(倭寇) 활동, 해적질을 벌였다.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던 조선은 강온 양면 정책을 통해 대마도를 통제하려 했다.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의 지휘 아래 병선 227척과 병력 1만7000여 명을 보내 정벌했던 것이 강경책의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이후 조선은 대마도를 우대하고 회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다. 도주(島主) 소씨(宗氏)에게 왜구를 단속하고 조선을 왕래하는 일본인에 대한 통제 임무를 맡기는 대가로 무역 독점권을 주었다. 또 해마다 미곡 수백 석을 하사하고 면포·삼베·인삼·호피(虎皮)·표피(豹皮)·매 등 온갖 물자를 공급했다. 사실상 대마도를 먹여 살렸던 셈이다.

일본 입조(入朝) 요구를 조선통신사로 풀어

생활환경이 척박한 대마도는 조선과 교류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조선은 강온 양면작전을 펴며 대마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사진은 대마도에서 한국어 통역사를 양성하는 한국어학교가 있었던 코세이지(광정사)이다. [중앙포토]

생활환경이 척박한 대마도는 조선과 교류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조선은 강온 양면작전을 펴며 대마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사진은 대마도에서 한국어 통역사를 양성하는 한국어학교가 있었던 코세이지(광정사)이다. [중앙포토]

조선은 또한 부산·울산·진해, 이른바 삼포(三浦)에 왜관(倭館)을 열어 주었다. 일본인을 위한 객관(客館)이자 거주 공간이다. 삼포에서 일본인은 어로나 상업 활동을 통해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여 주변의 조선인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소문을 듣고 수많은 대마도인이 삼포로 몰려들었다. 16세기 초 삼포 거주 일본인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는데 대다수는 대마도 출신이었다. 그들에게 삼포는 빈곤한 대마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낙토(樂土)였다.

자활 능력이 없던 대마도에 15세기 이래 조선과의 접촉과 무역은 생명줄이었다. 조선을 상국(上國)이자 대국(大國)으로 받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 또한 대마도를 충순한 신하로 여겼다. 하지만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九州)를 정벌하여 전국(戰國) 일본을 통일하자 대마도에 위기가 닥친다. 같은 해 여름, 히데요시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 국왕을 교토(京都)로 입조(入朝)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상국’으로 받드는 조선 국왕을 데려오라는 황당한 명령에 요시토시는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생활환경이 척박한 대마도는 조선과 교류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조선은 강온 양면작전을 펴며 대마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사진은 대마도주를 모신 사찰인 원통사다. [중앙포토]

생활환경이 척박한 대마도는 조선과 교류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조선은 강온 양면작전을 펴며 대마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사진은 대마도주를 모신 사찰인 원통사다. [중앙포토]

같은 해 9월 조선에 사자를 보내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으니 축하하는 통신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상국’이자 ‘물주’인 조선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입조’가 아닌 ‘통신사 파견’으로 말을 바꿨다. 그럼에도 조선이 거부하고, 히데요시의 독촉이 이어지자 요시토시는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두 차례나 조선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간절한 애원 끝에 통신사 파견을 이끌어낸다.

1591년 2월, 히데요시는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이 귀국할 때 ‘명을 치는데 조선이 앞장서라(征明向導)’고 떠벌이는 국서를 들려 보낸다. 조선이 격분할 것을 우려한 요시토시와 겐소는 다시 조선으로 달려온다. 히데요시의 요구가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선을 통과하여 명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假道入明)’는 의미라고 강조한다. ‘정명향도’를 ‘가도입명’으로 바꿈으로써 양국 관계의 파탄을 막아보려는 안간힘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나가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부하여 처형당할 것인가, 조선과의 관계가 끊어져 굶어 죽을 것인가. 요시토시는 양자 모두를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일본인이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조선 침략을 강행하면서 요시토시에게 침략군의 선봉에 설 것과 조선으로 이어지는 병참선을 담당할 것을 명령한다. 요시토시는 1592년 4월 12일,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의 선봉장이 돼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유키나가와 요시토시의 침략군은 승승장구했다. 5월 3일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했고, 6월 1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다. 대마도에 은혜를 베풀었던 조선은 요시토시의 배신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대마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시토시는 1599년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 1600년 유타니 야스케(柚谷彌介)를 잇따라 조선에 보냈다. 침략을 사죄하고 관계를 재개해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답이 없었고 사자들은 귀환하지 못했다.

요시토시는 포기하지 않고 왜란 때 붙잡혀 온 조선 피로인(被擄人) 160명을 송환했다. 성의 표시였다. 또 “새로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히데요시의 침략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여 도쿠가와 정권과 강화(講和)를 맺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계속 거부하면 재침(再侵)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고갈된 데다 명군도 철수해 버린 상황에서 조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명 카드’를 다시 빼 들었다. “전쟁 이후 명의 허락 없이는 일본과 함부로 접촉할 수 없다”고 둘러댔다. 또 요동에 연락해 명군 장수를 부산까지 불러들였다. 명의 위세를 빌려 재침 위협에 맞서려는 호가호위(狐假虎威) 전술이었다. 1605년 부산에 내려온 명군 장수 유흥한(劉興漢)은 대마도 사자들 앞에서 일장 훈시를 한다. “너희들이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에 대비하여 명군 수만 명이 평안도에 대기 중이니 물러가라”는 내용이었다. 대마도 사자들은 유흥한의 호통에 ‘예예’하면서 복종하는 시늉을 했다.

조선 방방곡곡 다니며 방대한 정보 수집

생활환경이 척박한 대마도는 조선과 교류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조선은 강온 양면작전을 펴며 대마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사진은 대마도 해안풍경이다. [중앙포토]

생활환경이 척박한 대마도는 조선과 교류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조선은 강온 양면작전을 펴며 대마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사진은 대마도 해안풍경이다. [중앙포토]

하지만 상황은 이내 반전된다. 대마도 사자들은 부사첨사 이경호(李景湖)에게 “우리들이 얼마 전에 평안도에서 이것을 잘라 가져왔다”며 철산(鐵山) 지역의 이정표의 일부를 보여준다. 그들은 명군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평안도까지 조선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조선 사정을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들에게 기만적인 호가호위 전술이 통할 리 없었다.

대마도의 집요한 공작에 밀린 조선은 강화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건다. 도쿠가와 정권이 먼저 강화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고 임진왜란 때 선정릉(宣靖陵)을 파헤친 범인(犯陵賊)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다. 중세시대에는 전쟁을 치른 뒤 먼저 국서를 보내는 것은 항복을 의미했다. 당연히 도쿠가와 정권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하지만 뻔뻔한 대마도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이에야스의 국서를 위조하고 대마도의 사형수 두 명을 범릉적으로 둔갑시켜 조선에 보낸다. 조건이 충족되자 1607년 조선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여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1609년 대마도와의 무역도 공식적으로 재개한다. 대마도가 다시 생명줄을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소씨는 척박하고 가난한 변방의 오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교활하면서도 전략적으로 행동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한 역사가는 일찍이 소씨를 가리켜 ‘여덟 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무렵 대마도가 보여준 외교술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노회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회답겸쇄환사, 그 안에 담긴 뜻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 재개는 고사하고 어떤 접촉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와 대마도가 집요하게 강화를 요구한 데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떠오르고 있던 정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원수’ 일본과 강화할 수 없다는 명분과 국제정세 변화라는 현실 사이에서 조선이 고민 끝에 제시한 것이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내고 범릉적을 잡아 보내라는 조건이었다.

대마도의 기민하고 교활한 공작을 통해 두 조건이 충족되자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보낸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에 ‘회답’하고 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 백성을 데려온다(쇄환)’는 것을 강조한 명칭이다. 왜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명분과 현실을 동시에 고려하려 했던 조선 외교의 고뇌가 드러나는 명칭이기도 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