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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깬 이자람의 창극…소원이 이뤄지면 진짜 행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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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소리꾼 9명이 등장하는 국립창극단의 신작 ‘나무, 물고기, 달’. 소원을 이뤄주는 나무로 향해 나서는 이들의 이야기다. [사진 국립창극단]

소리꾼 9명이 등장하는 국립창극단의 신작 ‘나무, 물고기, 달’. 소원을 이뤄주는 나무로 향해 나서는 이들의 이야기다. [사진 국립창극단]

소원을 이뤄주는 나무 앞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배가 고팠던 소녀는 고슬고슬한 밥을 얻고, 고단하던 순례자에게는 안락한 누울 자리가 생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들 마음에 있는 어두운 생각, 두려움, 공포까지 실현된다면 어떻게 될까. 소원 나무 앞에서 어떤 생각을 안 하는 것은 가능할까.

창극 ‘나무, 물고기, 달’ 오늘 개막 #한국·인도·중국 설화 고루 활용 #인간 욕망에 대한 서사 풀어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창극 ‘나무, 물고기, 달’이 11일 개막한다. 국립창극단의 신작이다. 판소리를 활용해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온 ‘스타 국악인’ 이자람이 음악 감독을 맡고, 연극의 형식 확장이 특기인 배요섭이 연출했다.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이번 작품은 여러 점에서 예상을 깬다. 우선 ‘소원을 이뤄주는 존재’에 대한 설화를 한국의 것만 가져오지 않았다. 인도의 설화를 더 많이 사용하고 중국의 이야기도 고루 활용했다. 수미산에 솟아있는 소원 나무는 인도의 신화에 원형이 있다. 빈 들판에서 태어난 아이가 부모를 찾으러 떠난다는 ‘길 위’의 설정은 제주도 구전 신화 ‘원천강본풀이’에서 가져왔고, 중국의 월하노인 설화도 녹아있다. 범아시아의 이야기가 판소리 창법을 빌려 하나의 창극이 됐다.

음악 또한 때때로 규범을 벗어난다. 이자람은 “‘이 정도 선까지 넘어보면 어떨까’ 싶은 음악적 시도들을 해봤다”며 “기본적인 선율의 짜임 사이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선율, 선법, 조성이 다양하다. 어느 장면에서는 한 곡 안에 장조와 단조가 바뀌는 일도 많다”고 전했다. 기존 판소리의 조성으로 진행되는가 싶은 노래에서 갑작스러운 음들이 튀어나오고 합창 장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소리까지 등장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예상을 벗어난다. 소원 나무를 찾아가는 여정은 극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 뼈대가 된다. 극 중 소리꾼들이 나무를 찾으면 이야기가 끝날 듯하다. 그러나 진짜 주제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전래동화처럼 순탄하던 이야기가 결말 부분에서 결을 바꾼다. 소원 나무 앞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실현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품으며 작품의 주제가 된다. “자기 마음에 쓸려가버린”사람에 대한 성찰, “어떤 생각을 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 등이 이어진다. 결국엔 “난(넌) 아무것도 아니다”“행복도 불행도 지나가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깨달음으로 막이 내린다. 하나의 소원을 절대적으로 붙들고 사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결론이다.

창작 판소리 ‘사천가’(2007년), ‘억척가’(2011년)으로 새로운 국악의 상징이 됐던 이자람은 2017년부터 국립창극단과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고선웅 연출의 ‘흥보씨’(2017년)에서 작창·작곡·음악감독을 맡은 데 이어 2018년 ‘소녀가’를, 2019년 ‘시(詩)’와 ‘패왕별희’를 제작했다. 연극 무대를 만들어온 배요섭은 지난해 소리꾼 두 명의 배틀 판소리극 ‘호신술전’을 만들면서 판소리의 무대화 작업을 시작했다. ‘나무, 물고기, 달’공연은 21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린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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