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경태의 이코노믹스

성장의 보수, 평등의 진보 넘어 ‘제3의 길’로 가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왜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필요한가

이경태 전 OECD 대사

이경태 전 OECD 대사

1997년 외환위기는 소득분배 악화의 분수령이었다. 실업률이 2.1%에서 7.6%로 치솟았으니 단기적인 충격은 피할 수 없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어두운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낯선 이름의 고용이 일반화됐고 조기퇴직이 관행적으로 굳어졌다. 고성장시대의 종언은 저소득 계층의 삶을 더욱 신산하게 만들었다.

복지 정책은 원래 보수 정권의 테마 #진보 정권에 내주면서 보수 길 잃어 #진보의 경쟁 제한은 시장 왜곡 초래 #성장하되 불평등 줄이는 노력 필요

1 한국사회의 불평등 자화상

한국의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외환위기 이전의 0.24수준에서 1998년 0.31로 급증했다가 다소 안정됐으나 위기 이전보다는 훨씬 높은 0.3수준에 머물고 있다. 최저임금의 과도한 인상이 가져온 저임금 일자리의 감소와 코로나 대유행의 피해가 저소득계층에 집중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 3년의 불평등은 더욱 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니계수 등 거시적 불평등지수는 통시적 추이를 관찰하거나 국가 간 비교에 유용하지만, 불평등에 대해 실감 나는 정보를 전달해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지니계수가 올라갔다고 해서 노숙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아니고 없던 판자촌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막연히 “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간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구나”라고 짐작할 뿐이다.

불평등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는 신호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다. 2020년 12월 현재 취업자 2652만명 중에서 임시근로자와 일용근로자는 559만명이다. 여기에 사내하청근로자, 파견근로자 등을 합치고 상용근로자 중 상당수도 비정규직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비정규직은 700만명에 육박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대기업 정규직의 40% 정도에 불과하고 절반 정도는 사회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또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 412만명 중 300만명 정도를 저소득층으로 본다. 결국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자를 모두 합한 저소득·고용 불안정계층은 1000만명에 이른다. 이는 총취업자의 40% 규모다.

이런 상황에서는 파이를 더 키워야 한다는 성장론자들의 주장은 공감을 얻기가 어렵다. 성장의 결과 좋은 일자리도 늘어나겠지만,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이 더 빠르게 늘어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인식이다.

2 보수는 불평등 현상을 망각

이경태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이경태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물론 성장하지 않으면 저임금 일자리마저도 늘어나지 않을 테니까 성장은 분배의 필요조건이다. 보수는 선성장-후분배 정책을 내걸었는데 고도성장기에는 아랫목의 온기가 윗목으로 퍼져나가는 낙수효과가 작동해 분배 양극화를 어느 정도 예방했다.

그렇다고 해서 보수정부가 평등과 복지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토지개혁·의무교육 등 사회개혁과 의료보험·산업재해보험·국민연금·고용보험의 복지정책은 보수정부 때 시작됐다. 보수정부가 강제적으로 재벌기업의 주식을 상장시켜서 일반 국민도 주주가 되는 길을 열어 준 기업공개는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나누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진보세력이 집권해 평등과 복지를 강하게 내세운 이후로는 보수가 보듬은 평등의 가치가 진보의 전유물로 여겨지게 됐다. 보수는 과거 집권기에 성취했던 평등사회 만들기의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지 않고 도리어 부정하는 퇴행적인 모습마저 보인다. 보수가 진영논리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진보의 획일적 평등과 과잉복지 공세를 반대하다 보니 평등의 가치마저도 경원시하게 됐다는 얘기다. 보수의 퇴행적 행보는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서 불평등에 고통받는 국민을 외면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3 시장경쟁을 백안시하는 진보

진보는 경쟁을 불평등의 원천으로 여기고 기회 닿는 대로 경쟁을 제한하려고 한다. 골목상권 보호를 위한 대형마트 규제, 중소기업 적합 업종 지정, 비정규직의 기계적 정규직화, 최저임금의 과도한 인상이 그 예다. 기업규제 완화에 인색하고 재벌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기업 옥죄기를 강행하는 근저에는 반(反)경쟁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태생적으로 평등가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으니 재정은 비대해지고 규제는 늘어만 간다. 그 결과는 효율의 희생과 성장률의 저하다. 복지지출을 급격하게 늘리고 있으나 잘못된 정책 때문에 시장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커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니계수 추이·소득 5분위배율 추이

지니계수 추이·소득 5분위배율 추이

시장경쟁에 대한 불신은 시장의 고유한 기능인 성장까지도 정부가 가로채려고 한다. 소득주도성장, 공공일자리, 재정투입형 창업 촉진과 뉴딜 등에서 그 의지가 읽힌다. 시장 억압적-정부 주도적 성장정책은 역설적으로 성장을 둔화시키고 좋은 일자리 창출을 저해하여 분배마저 악화시킨다. 잘못된 정책이 지금은 코로나에 가려져 있으나 코로나 이후가 되면 성장과 평등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공산이 크다.

문 대통령은 “기회가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은 자유경쟁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문 대통령도 시장주의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의로운 결과’의 실체는 무엇인가. 경쟁은 불평등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정의의 이름 아래 평등한 결과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4 진보·보수의 좌우 합작이 시대적 요구

성장 일변도의 보수와 평등 집착의 진보 구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저성장과 양극화가 뉴노멀이 된 시대의 덫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장의 혁신능력을 받아들이면서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는 보수와 진보의 좌우합작이 피할 수 없는 과제다. 보수는 시장경제의 가치를 지키면서 평등을 지향하고, 진보는 평등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시장의 혁신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좌우합작이 야합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고안해 내어야 한다. 그 해답은 한국형 제3의 길, 분배 친화적인 시장경제다. 시장경제의 메커니즘 안에서 최대한의 평등을 실현해 보자는 접근이다.

시장 내 분배의 주체는 기업이다. 기업의 목표를 주주 이익 극대화에서 이해관계자 상생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종업원·협력업체·소비자·공동체와 함께 번영하겠다는 주주 의지를 정관에 명시해 의무화함으로써 기업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이 제안에 대해서 시장 근본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인 망발이라고 혹평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국가주의임에 반해 이해관계자 상생은 기업의 자발적 의지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자본주의는 지난 200여년 동안 부단히 진화해 왔다. 고삐 풀린 이윤 욕망을 순치하면서 인간존중과 기업윤리를 창달하고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업이 스스로 각성하지 못하고 정치권력의 외압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순응했을 뿐이다. 이제는 기업이 자율적인 의지로 이해관계자 상생을 실천할 때가 됐다. 다행히도 최근 퍼지고 있는 ESG(환경,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 경영은 이해관계자 상생 경영이 새로운 기업목표로서 자리 잡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던져 준다.

5 거짓 선동의 포퓰리즘 가려내야

경제학은 ‘불평등을 줄이려는 정책은 성장을 방해하고, 복지는 나태를 낳기 마련’이라고 현실을 인식한다. 그래서 평등정책을 부정하거나 신중한 자세를 견지해왔다. 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불만을 가진 유권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고소득자의 세금을 올리고 복지를 늘린다. 결국 평등의 문제는 정치적 해결에 의존하게 된다. 영국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알려진 복지정책은 2차대전 이후 보수당의 반대를 이겨내고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이 채택했다. 미국에서는 1894년 연방 소득세법이 제정됐으나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받았고 1913년에 가서야 실행될 수 있었다.

경제학이 기여해야 할 부분은 성장과 평등간의 관계를 이론적·실증적으로 최대한 명확히 규명해 정치적 공론과정이 사실에 바탕을 두게 하는 것이다. 평등 담론을 이념대립과 거짓선동의 포퓰리즘으로부터 해방해야 하는 책무는 경제학자의 역할이 돼야 한다. 평등정책이 효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부터 최소화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대중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해결을 지양하고 기업 스스로 이해관계자와 상생하겠다는 분배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 요망된다. 이는 단기적으로 기업이윤 추구에 부정적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한 기업가치의 실현과 부합한다. 정치권력의 외압 소지를 원천적으로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이경태

전 OECD 대사. 서울대와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재무부를 거쳐 산업연구원 부원장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대표부 대사를 지냈다. 『평등으로 가는 제3의 길』 저자.

이경태 전 OECD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