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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봄 내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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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7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두꺼운 옷을 벗고 햇볕을 쬐기 시작한 지난 삼일 사이, 삶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는 세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

깊은 겨울 속 다시 찾아온 봄 #우리들 삶 속 일상의 신호는 #멈추지 않고 지속해왔듯 #앞으로도 계속됨을 증거해

상황 1. 지방에서 연구와 강의에 바쁘실 교수님께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주위의 소음이 섞여 어디시냐 여쭤보니 서울역이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비대면 시대에 웬일이시냐는 물음에 검역수칙을 다 지키며 오프라인 미팅을 하셨답니다. 정의된 일을 진행하는 것은 온라인으로도 충분하지만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는 만나서 서로 인사를 하고 합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는 부연설명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집니다. 말뿐 아니라 자료까지도 랜선으로 손쉽게 나눌 수 있는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본능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언어가 없던 시절, 피아를 식별하고 신뢰를 확인하기 위해 표정이나 눈빛 같은 신호들로 생존의 확률을 높였던 까마득한 조상들의 흔적들이 지금도 우리 안에 선명히 남아있음을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상황 2. 커리어를 바꾸기 위해 준비 중인 지인과 점심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벌써 20년도 넘게 국내외 큰 기업에서 쉬지 않고 일을 하다 몇 개월의 휴지기를 가지며 다음 직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동시대를 함께 지내온 연대와 공감으로 폭풍 수다를 떨다가 찾아온 이유 중 하나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도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어 온 식구가 온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조금은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에 정보도 나눌 겸 겸사겸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너무 붙어있으면 스트레스로 관계에 상처가 날 수 있음을 공감하며 “마음은 가깝게, 몸은 때로 멀어지는 것”이 사랑에 도움이 된다는 얼마 전 강연장에서 만난 한 작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상황 3.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온라인 입학식이 열린다며 재학생 학부모들의 참여를 요청해왔습니다. 대세로 떠오른 “범 내려온다”의 안무를 연습해서 동영상으로 찍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난 몸치라 어렵다 손사래를 쳐도 잘 못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는 말에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튜브의 튜토리얼을 보고 한 동작씩 따라 해봐도 합쳐진 모습은 이런 가관이 없습니다. 괴발개발 비뚤비뚤 쓴 글씨처럼 조각난 동작들을 찍어서 아이에게 전해주자마자 뚝딱뚝딱 동영상을 만들어 왔습니다. 제대로 된 배경음악에 몇 개의 동작들을 한 화면에 배열하고 반복해서 틀어내니 나름 노력상도 노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듭니다. 이 모든 편집이 휴대폰의 조그만 화면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모바일 네이티브의 저력을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빅데이터 2/26

빅데이터 2/26

이처럼 따뜻한 바람과 함께 다시 깨어나는 일상 속 발견들은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동류를 찾고 귀속감을 피부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무리를 지어 살아남은 종에게 필연적인 형질로 남아있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의사소통을 가상화한다 해도 오감의 충실함과 그를 넘어선 육감의 영역까지 탐하는 우리의 본능은 바이러스가 엄습해도 멈출 수 없습니다.

천륜이라 불리는 가족 간의 유대도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줍니다. 모든 종마다 저마다의 세력권(territory)을 가져야 함은 개체를 분산하여 과밀을 방지함으로 불안감을 낮춰주기 위함입니다. 일정한 안전거리는 각자의 소중함을 적절히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아이들도 멈추지 않고 자랍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온종일 컴퓨터만 보고 있기에 겨우내 걱정했지만 이따금 함께 서보면 한마디씩 길어지는 대나무처럼 몸은 훌쩍 커졌고, 새로운 디바이스로 멋진 것을 만드는 일에 능숙해진 것을 보면 머리도 쉬지 않고 자라고 있습니다.

봄이 내려옵니다. 그것도 으라차차 오고 있습니다. 겨울이 깊었기에 봄이 오는 소리와 기세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코로나가 온 행성을 뒤덮고 숨죽이게 만들었기에 뒤덮인 눈 속 겨울잠을 자는 듯 모두 멈춰 있을 것만 같았지만, 지난 삼일간 주위에서 발견한 일들은 생명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음을 제게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지속되고 아이는 계속 자랍니다. 땅이 흔들리고 화산이 폭발하고 운석이 떨어졌어도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기에, 이 봄 또한 다시 굉장하게 내려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