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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육 눈 감고도 만들지만, 족발은 아직 미완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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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호 18면

EBS ‘세계테마기행-꽃중년 편’과 ‘신계숙의 맛터사이클 다이어리’로 화제를 모은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신계숙(59) 교수가 최근 『신계숙의 일단 하는 인생』이라는 에세이를 출판했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중식당 주방에 들어가 요리에 입문, 문화센터 강사를 거쳐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의 치열했던 삶을 맛깔스러운 중국 요리에 빗대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이 시종일관 유쾌하게 읽히는 이유는 ‘요리도 인생도 하다 보니 되더라’는 책의 부제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도전해온 그의 삶 자체가 신명나기 때문이다.

‘할리’ 타는 중화요리사 신계숙 교수 #중문학과 나와 중식당 주방 8년 #닭발 발톱 자르는 알바로 입문 #요리계 ‘일타 강사’로 전국 누벼 #청나라 조리서 『수원식단』 번역 #“할리 타고 달릴 때 하늘 나는 기분 #혼자만의 시간 없으면 스트레스”

색소폰 불고 드론 날리기 취미도

‘통제’라는 별명의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을 탄 신 교수. 전민규 기자

‘통제’라는 별명의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을 탄 신 교수. 전민규 기자

미식가의 시조로 통하는 프랑스의 저술가 브리야 샤바렝은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중국요리 전문가 신계숙은 이렇게 말한다. “취미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국내 최고령 할리 데이비슨 여성 라이더’ ‘색소폰 불고 드론 날리는 요리사’는 모두 그의 왕성한 취미 덕분에 붙여진 수식어다.

인터뷰 당일에도 신 교수는 몸무게의 4~5배가 넘는 250㎏짜리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 48’을 타고 등장했다. 가죽점퍼·바지·부츠까지 온통 까맣게 입은 그의 목에선 빨강 마후라가 휘날렸다.

“갱년기를 거치면서 답답증이 생겨 3년 전 ‘베스파’ 스쿠터를 샀죠. 할리는 1년 전부터 타기 시작했어요. 소형차 모닝보다 힘이 센 1200㏄짜리 할리를 타고 질주하다 보면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어요. 옷 속에 스며든 바람이 내 몸을 감싸며 ‘싸악~’ 빠져나갈 때의 기분이 너무 좋아요.”

신 교수는 두 개의 바이크에 ‘통제’와 ‘양제’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힘을 주는 진통제와 영양제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클러치를 잡으려면 엄청난 악력이 필요해요. 장거리 주행을 할라치면 다리를 죽 뻗도록 디자인된 물건이라 허리가 뻐근하죠. 근력을 키우기 위해 저절로 운동을 하게 돼요. 통제와 양제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거죠. 하하.”

개인 연구실 ‘계향각’에서 요리하는 모습.

개인 연구실 ‘계향각’에서 요리하는 모습.

6년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수업을 들었다는 색소폰도,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드론도, 다 건강하고 유쾌한 꽃중년 라이프를 위한 비타민이다.

“우리 세대는 혼자 노는 것을 두려워하죠. 특히 여자 혼자(그는 비혼주의자다) 여행하는 일은 ‘사연 있는 여자’로 보일까 봐 꺼리잖아요. 살면서 깨달은 건, ‘혼자만의 시간’이 없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혼자 놀기의 고수가 되려고 합니다.”

충남 당진 합덕읍이 고향인 신 교수는 “만석꾼에서 조금 모자란” 집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딸이라서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 덕분에 여중 2학년 때 서울로 유학 와 단국대 중문과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중화요리 대가 이향방 선생의 고급 요리점 ‘향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인생 2막을 열게 된다.

“홀 서빙 정도 할 줄 알았는데 처음 하게 된 일이 닭발 발톱 자르기였어요. 무더기로 쌓인 닭발을 보고 망연자실하다 다음엔 뭘 시킬까, 내가 할 일은 어디까지 확장될까 궁금해졌죠.”

졸업 후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향원을 다시 찾았다. 1987년 당시 국내에서 중화요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비화교 여성요리사는 드물었다. “대학 보내놨더니 중국집 식모살이나 한다”며 아버지의 실망이 컸지만, 알고 보면 이 또한 아버지의 ‘설계’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버지는 7살짜리 막내딸에게 작은 칠판 하나를 선물했고, 당시 벽지 대신 발랐던 신문(옛날 신문은 한자 반 한글 반이었다)에서 한자를 발견한 딸은 그 묘하게 생긴 글꼴들을 칠판에 흉내 내면서 놀았다. 중학교 때 이미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문 박사’로 통했다.

“어려서부터 친숙한 한자 덕분에 음식과 재료 이름 익히기가 수월했죠. 사실 몇 가지 한자만 알아도 중화요리를 먹는 즐거움이 확 달라지거든요. 닭·돼지·소 어떤 재료를 썼는지, 신맛인지 매운맛인지, 튀겼는지 삶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음식 만드는 게 싫지 않았고, 한자를 통해 다양한 음식의 역사·문화를 배우는 데 재미가 생겨 요리사가 되자 결심했죠.”

향원에서 8년을 보냈고, 그 사이 타이완으로 1년간 요리 유학도 다녀왔다. 그리고 “몸집은 째깐한데 ‘자존심(프라이드)’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단 소형 자동차를 타고 4년간 전국의 문화센터를 누비며” 요리계 일타 강사로 일했다. 틈틈이 공부하며 대학원에서 식품영양학 석·박사 학위를 딴 후에는 음식점을 낼까, 대학 강단에 설까 고민하다가 ‘가르치는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방학 때마다 중국 전역을 돌며 본토 요리들을 섭렵하고 있다. 그가 방문한 도시는 27개에 이른다.

식재료 아끼고 정성 다하는 게 예의

중국 북송시대 시인 소동파의 이름에서 유래한 삼겹살 요리 ‘동파육’. 신계숙 교수가 만든 것은 비계와 살코기가 적절한 비율로 층을 이루고 식감도 부드러워 ‘티라미수 동파육’이라 불린다. 서정민 기자

중국 북송시대 시인 소동파의 이름에서 유래한 삼겹살 요리 ‘동파육’. 신계숙 교수가 만든 것은 비계와 살코기가 적절한 비율로 층을 이루고 식감도 부드러워 ‘티라미수 동파육’이라 불린다. 서정민 기자

그의 요리사로서 또 스승으로서의 철학은 책 『수원식단』에서 출발한다. 중국의 문인이자 미식가였던 원매가 40년 간 모으고 정리한 청나라 때 조리서로, 360여 가지의 다양한 요리가 기록돼 있다. 신 교수는 2015년에 이 책을 번역·출판했다.

“책 서두에 적힌 ‘요리사가 꼭 알아야 할 20계명과 해서는 안 될 14계명’ 때문에 평생을 끼고 살고 있네요. 단순히 요리사로서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될 만한 내용들이거든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도 수시로 언급하는 내용인데, 이때 충청도 사투리로 웃음을 구사하는 ‘신계숙 스타일’의 유쾌함이 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썰다 남은 당근을 쓰레기통에 툭 내버리는 모습을 보면 ‘식재료를 아끼고 정성으로 다루는 예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당근도 밭에서 엄마 아빠랑 더 오랫동안 있고 싶었을 거여. 그런데 지금 요리 재료가 되려고 부모님과 생이별하고 여기까지 왔으니께 우리가 아껴 써줘야지.”

고구마와 설탕이 어우러진 중식 디저트 ‘빠스’. 서정민 기자

고구마와 설탕이 어우러진 중식 디저트 ‘빠스’. 서정민 기자

『수원식단』 요리 가짓수만도 수백 개. 신 교수가 그동안 만든 중국요리 개수는 훨씬 더 많겠지만 그가 가장 애정하는 음식은 ‘동파육’과 ‘족발’이다. 동파육(東坡肉)은 중국 북송시대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이름에서 유래한 삼겹살 요리다. 8시간 이상 삶아 간장소스를 얹으면 비계와 살코기가 크림치즈와 초콜릿으로 층을 이룬 티라미수 케이크처럼 영롱한 자태를 드러낸다. 입 안에 넣는 순간 부드럽게 녹는 식감과 달콤한 맛 또한 영락없다. 그래서 지인들은 이를 ‘티라미수 동파육’이라고 부른다.

“동파육은 이제 눈감고도 만들 수 있다”는 그가 의외로 “아직 미완성”이라고 말하는 음식이 족발이다.

중앙SUNDAY COOK

중앙SUNDAY COOK

“족발 윗부분은 사람 허벅지만큼 두껍고 아랫부분은 손가락만큼 가는데 그걸 대부분의 족발집에선 한꺼번에 삶아버려요. 저는 이걸 분리해서 부위마다 알맞은 시간만큼 삶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돼지에 대한 예의죠. 돼지는 인간을 위해 모든 걸 희생했는데, 요리사로서 나는 돼지를 위해 무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야죠. 그래서 족발을 8등분, 12등분…1㎝ 조각으로 썰어가며 실험 중이에요. 더 찬란한 족발을 만들기 위해서. 이 정도면 돼지도 고마워 하겠쥬? 하하.”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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