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특별기고] “시스템·문화 못 바꾸면 학폭 또 나온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모글스키 국가대표 출신으로 문체부 혁신위원회에서 체육 개혁에 앞장선 서정화. 최정동 기자

모글스키 국가대표 출신으로 문체부 혁신위원회에서 체육 개혁에 앞장선 서정화. 최정동 기자

배구계에서 시작한 ‘학폭(학교 폭력)’ 논란이 스포츠 전체로 번지는 분위기다. 매스컴이 앞다퉈 폭력의 잔혹성을 조명하자, 여론은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고, 담당 기관이 부랴부랴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는다. 이어질 과정도 눈에 선하다. 정부의 대책 마련 지시, 관련 체육 단체 사과, 해당 종목 전수조사, 그리고 처벌 강화. 2019년 쇼트트랙 코치 조재범 사건 때도, 지난해 철인 3종 고 최숙현 사망 사건 때도 그랬다.

그나마 이번 사건이 ‘학폭’으로 보도되는 건 주목할 만하다. 그간 학생 선수가 폭력에 시달려도 늘 ‘스포츠 폭력’ 꼬리표가 붙었다. ‘선수’만 남기고 ‘학생’은 지웠다. 학교 내 운동부 폭력은 엄연히 ‘학교’ 울타리 안에서 다뤄야 할 문제다. 학생 선수를 돌볼 책임은 감독과 해당 종목단체뿐 아니라 학교, 그리고 교육 당국에도 있다.

이번 사건은 뻔한 한국식 스포츠 인권 침해 구조의 재탕이라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가해자인 쌍둥이(이재영, 다영) 자매는 해당 종목의 소위 ‘권력자’였다. 몸담는 팀마다 주축 선수였고, 국가대표로 성장했다. 어머니(김경희)는 배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출전했다.

관련기사

피해자 부모 진술에 따르면, 쌍둥이 어머니는 선수 이력을 앞세워 경기가 두 딸 위주로 진행되도록 종용했다. 그 결과 쌍둥이는 경기 흐름과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고, 거리낌 없이 동료 선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이는 지난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 최숙현 스토리를 빼닮았다. 선배였던 가해자(장윤정)는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로, 해당 종목 국내 일인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후배를 괴롭혔다.

피해자 목소리가 묻힌 점도 같다. 피해 선수는 소속팀 감독에게 폭행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조용히 넘어가자”는 답변만 들었다. 감독에게는 인권보다 승리가 중요했다. 계약 기간 연장이나 연봉 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의 인권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 고 최숙현의 경우에도, 감독과 팀 닥터가 가해자 편을 들며 함께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서정화는 후배 스키 선수들의 훈련을 돕기 위해 춘천에 워터점프장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최정동 기자

서정화는 후배 스키 선수들의 훈련을 돕기 위해 춘천에 워터점프장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최정동 기자

팀 외부에 피해자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는 점도 같다. 쌍둥이 사건 피해 선수 부모는 “딸이 지속해서 폭행당하는 걸 알았지만, 배구를 계속시키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고 말했다. 부당한 피해에 대해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하면, 결국 피해자가 경기장을 떠나야만 하는 아이러니다.

수많은 선수가 오랫동안 이런 장면을 지켜봤고, 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운동을 삶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피해 선수에게 “모든 걸 포기하고 신고하라”는 말이 통할까. 학폭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실을 털어놓기까지 10년이 걸렸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해자에 대한 엄벌이 필요하지만, 이를 근본 해결책으로 여겨선 곤란하다. 한국 스포츠계는 선수 인권보다 메달을 우선시했다. 유사한 사건의 가해자들이 보여준 정형성은 개인의 일탈을 넘어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기록과 성적 향상을 위해 피, 땀, 눈물을 쏟은 선수다.

2018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당시의 서정화. [연합뉴스]

2018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당시의 서정화. [연합뉴스]

운동선수끼리 모이면 종종 각자 경험한 폭력 피해를 털어놓는다. 마지막엔 늘 짙은 한숨이다. 선수 시절에 좀 더 시야가 넓었다면, 운동 너머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면 대응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2021년에도 학생 선수의 삶은 보통의 학생과 다르다. 합숙하는 종목이 많고, 언어·신체 폭력은 비일비재하다. “운동하면 원래 다 그래”라는 말로 모든 걸 합리화하려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누가 봐도 비정상인데, ‘내부자’끼리만 정상이라 믿으며 버틴다.

승자만 박수받는 문화 속에서 선수 개인의 피해는 영원히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메달을 목에 걸기 위한 도전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단 한 명의 피해자라도 생겨선 안 된다. 희생자의 눈물로 빚은 메달은 절대 아름답지 않다.

서정화 전 문화체육관광부 혁신위원·전 모글스키 국가대표·아주대 로스쿨 재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