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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품은 미술관…20대도 푹 빠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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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7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장을 찾은 젊은 관람객들. 9일에도 예약이 매진됐다. 김성룡 기자

7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장을 찾은 젊은 관람객들. 9일에도 예약이 매진됐다. 김성룡 기자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와 아이를 붙잡아주며 웃는 아빠. 뒤에선 엄마와 누나가 지켜보고, 앞에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 단란한 가족을 바라본다. 누런 색감,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이 가족을 바라보는 손님 남자의 모습이 서글퍼 보인다.

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근대미술전 #정지용·이상·구본웅·이중섭 작품 #문인·화가 주고받던 영감에 초점 #시간당 70명 제한에도 2000명 ↑ #“BTS도 자주온대~” 팬들도 들썩

이중섭이 1955년에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1955). 전쟁 중 가족들(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이 극심한 절망에 빠져있던 때 그린 작품이다. 이중섭은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작업에 몰두했으나 1955년 1월에 연 개인전이 실패하자 일본에 있는 아내와 연락도 끊었다. 이 그림은 당시 오래된 친구이자 시인인 구상의 집(경북 왜관)에 머무르며 그린 것으로 그림 속 ‘손님’ 남자는 절망에 찬 이중섭 자신이었다.

이중섭의 ‘시인 구상의 가족’(195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의 ‘시인 구상의 가족’(195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MMCA·이하 국현) 덕수궁관에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이 지난 4일 개막했다. 국현이 여는 올해 첫 기획전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시기 시인·소설가 등 문인과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대 불문 중·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한 번쯤 접한 작가들이다. 정지용·이상·김기림·김광균 등의 시인과 이태준, 박태원 등 소설가, 그리고 구본웅, 이중섭, 김환기 등의 그림과 글을 4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는 화가 구본웅(1906~1953)이 1935년에 그린  ‘친구의 초상’으로 문을 열며 관람객을 1930년대로 안내한다. 미술사가들이 천재시인 ‘이상’(1910~1937) 초상으로 추정하는 그림이다. 1전시실은 1930년대 이상이 경성 종로에서 운영했던 ‘제비’ 다방을 배경으로 당시 예술가들이 시도한 예술적 실험을 조명한다.

이 중엔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6)이 그린 삽화 6점도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으로 유명한 박태원은 1933년 동아일보에 ‘반년간’을 연재하며 삽화를 그렸는데, 각 그림은 카메라 앵글이 독특하게 잡힌 영화 속 장면 같다. 박태원은 영화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다.

2전시실은 1920~40년대 신문과 잡지의 표지, 삽화를 조명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원본 시집을 볼 수 있다. 『사슴』(1936년)은 백석의 유일한 시집. 100부 한정해 출판한 것으로 오늘날 수집가들이 가장 소장하고 싶어하는 시집으로 꼽힌다.

천경자의 ‘정원’(196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천경자의 ‘정원’(196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3전시실 전시는 서로 영감을 주고받은 문인과 화가들의 교우에 초점을 맞췄다. 장욱진의 ‘사람’(1957), 천경자의 ‘정원’(1962), 김환기의 ‘무제’(1969~73)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개막일부터 문전성시다. 개막 후 4일간 관람객은 2000명. 코로나19 방역 조치로 입장 인원을 1시간당 70명으로 제한 중인 걸 고려하면 수용 최대치에 가깝다.

국립현대미술관 안에선 “덕수궁 전시 매니어가 있다”는 얘기가 돈 지 꽤 오래다. 1998년 12월 국현 분관으로 개관한 ‘덕수궁미술관’은 한국 근대미술 전문 미술관. 과거엔 프랑스 인상파전 등 블록버스터 전시도 소개했지만 10년 전부터는 한국 근대미술을 중점적으로 소개해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3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근대 대표 건축물이다. 김성룡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3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근대 대표 건축물이다. 김성룡 기자

특이한 것은 덕수궁미술관의 근대미술 향연을 20대가 가장 즐긴다는 점. 국현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 3년간 관람객 연령별 분포도에서 20대가 24.1%로 가장 많았다. 30~50대가 각각 13.1%, 14.9%, 12.7%로 엇비슷했고, 초중고생 16.5%(어린이는 별도 3.2%), 60대가 15.5% 순이었다.

김인혜 국현 근대미술팀장은 “우리 근대 시기의 역사와 미술을 중·장년층만 염두에 두지 않고 20~30대를 염두에 두고 전시 내용부터 공간연출까지 특별히 신경 썼다”면서 “초중고생은 단체 관람이 많고, 60대는 꾸준히 찾는 관객이 많다. 전 연령층이 고루 찾고 있다”고 했다.

고궁 속 미술관, 한국 대표 근대 건축물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근대미술 콘텐트의 매력, RM효과 등도 덕수궁관의 인기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박래현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근대미술은 작가마다 스토리가 있고, 작품과 삶이 모두 역사와 연결돼 있어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으며 공감 폭이 크다”고 말했다. 20대를 끌어들이는 데는 2018년 부터 주요 전시 때마다 미술관을 찾은 방탄소년단 리더 RM(김남준)의 영향도 있다는 분석이다.

김인혜 근대미술팀장은 “적은 비용으로 고궁 산책과 미술 전시 등 고 퀄러티 문화를 누리려는 젊은 세대가 찾는다는 점에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전문성과 대중성의 균형을 맞춘 전시를 선보이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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