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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여성 파우스트, 덮어놓고 한다 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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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년동안 남성이었던 '파우스트'의 여성 버전에 도전하는 배우 김성녀. [사진 국립극단]

190년동안 남성이었던 '파우스트'의 여성 버전에 도전하는 배우 김성녀. [사진 국립극단]

 “연극 ‘파우스트’를 같이 하자는 전화를 받고 물어봤죠. ‘내가 거기서 뭘 해. 젊고 예쁜 그레첸을 할 수도 없고’.”
2년 전 배우 김성녀(71)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연출가 조광화였다. 국립극단 70주년을 맞아 지난해 공연할 예정이던 ‘파우스트 엔딩’ 출연 부탁이었다. 이달 5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김성녀는 그때 이야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여자 파우스트래요. 덮어놓고 ‘그럼 할게요!’했어요. 세계 최초의 여자 파우스트잖아.”

이달 '파우스트 엔딩' 첫 무대 서는 배우 김성녀 인터뷰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60년을 들여 완성한 ‘파우스트’(1832)의 파우스트는 인간의 학문 전체를 섭렵한 노학자다. 물론 남성이다. 수많은 지식을 얻고 허무에 빠진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와 거래를 한 후 아름다운 여성 그레첸을 탐닉하게 된다. 고고한 정신과 육체의 욕망이 뒤엉키는 모순이 극을 이끌고 나간다. 조광화는 괴테 작품을 재창작해 ‘파우스트 엔딩’을 만들었다.

“그런데 여자 파우스트라고? 그 다음부터 고민이 시작됐어요. 어떻게 풀까. 파우스트는 누구나 남성 이미지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가.”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성 그레첸과 관계를 설정하기도 까다로웠다. 파우스트가 고령의 여성이라면 그레첸은 젊은 남성이어야할까? “그런데 관객들이 나이 많은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김성녀는 “그레첸은 여성으로 둬야한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육체적인 사랑 아니고, 인간끼리의 연민, 동성으로서의 공감을 나누게 되는 거죠”라고 했다. “원래는 파우스트와 그레첸 키스씬도 있었는데 내가 빼자고 했어요.”

190여년 만에 처음 여성이 된 파우스트는 이처럼 여성성도 남성성도 강조하지 않는다. 김성녀는 “굳이 색채를 찾는다면 중성으로 간다”고 했다. “노학자의 고민은 완전한 인간성을 만드는 데에 있는 거잖아요. 연출가는 그가 꼭 남성일 필요가 없어 여성으로 했다 하는데, 꼭 여성일 필요도 없는 거에요. 그래서 중성으로 시작해 그레첸을 만나면서 모성을 찾는 식으로 성별의 색채가 바뀌도록 고려했어요.” 남성 노학자의 말투를 간직한 대사를 김성녀는 여성의 목소리 그대로 자연스럽게 발성한다.

‘파우스트 엔딩’은 본래 지난해 4월 무대에 오를 계획이었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수상하던 그때, 김성녀는 첫 공연을 닷새 앞두고 연습실에서 넘어졌다. “파우스트가 악마와 거래를 하고 젊어지면서 팽글팽글 돌고 무대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날 따라 바닥에 종이가 많이 깔려있었고. 신나게 돌다가 종이를 밟고 붕 떴다가 떨어졌는데 어깨에 탈골, 골절이 와서 얼마나 아프던지….” 코로나 상황과 맞물리면서 공연은 취소됐고 이달 26일에야 첫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김성녀는 “그동안 극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조광화 연출은 총 3막 중 마지막 막을 거의 새로 썼다. ‘파우스트 엔딩’은 인류의 종말을 앞둔 세계에서의 고민, 서로 상처를 내는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담아내는 작품이 됐다. “지난해에 공연 준비할 때는 많이 흥분했었어요. 세계 최초의 여성 파우스트라는 생각에 기가 성성해서 달려나갔는데 1년동안 찬찬히 돌아보면서 힘을 많이 뺐어요.” 김성녀가 1년동안 더 주목한 부분은 ‘파우스트’의 메시지다. “여성 파우스트가 궁금해서 공연을 보러 왔다가도, 작품이 주는 질문을 생각하면서 돌아가면 좋겠어요.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환경오염에, 사람들은 서로 물어뜯고 악플 다는 세상에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지? 이 질문이요.”

김성녀는 1976년 연극으로 정식 데뷔해 연극, 뮤지컬, 창극 장르에서 활동한 배우다. 80~90년대엔 마당놀이의 부흥을 이끌어 ‘마당놀이의 여왕’으로 불렸다. “연극할 때 장민호 선배님은 ‘이제는 연극만 하라’고 했고, 가야금 병창을 가르쳐주신 박귀희 명창은 ‘국악 하나만 하라’고 했어요. 근데 저는 이것저것 다 해서 도대체 국악인인지, 연극인이지, 행정가인지 모르겠는,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게 됐죠. 어디에도 못 속해 외로웠지만 그덕에 여자 파우스트도 하는 거겠죠.”

‘파우스트 엔딩’은 이달 26일부터 다음 달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2012~2019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지냈고, 지난해 대학 교수직도 내려놓은 김성녀는 “배우로만 올인하는 경험은 평생 처음이다. 숨구멍이 트이는 것 같다”며 “배우 인생을 이제 어떻게 마무리할까가 화두”라고 했다. “좋은 역할 맡고 대우 받는 일은 이제 의미가 없고, 그냥 무대 뒤에 서 있는 노인 같은 역할을 하면서 나이든 배우가 도울 수 있는 걸 돕고 싶어요.”그는 “대우 안 해줘도 되니까 연륜 있는 작은 역할 필요하면 나 쓰라고 기사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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