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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코너 돌면 상생·공존의 생명화 시대 펼쳐질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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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호 02면

[SUNDAY 인터뷰] 이어령 전 장관의 코로나 1년 성찰

이어령 전 장관은 코로나19로 보낸 지난 1년을 성찰하며 “이제 상생·공생·공존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2월 촬영한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어령 전 장관은 코로나19로 보낸 지난 1년을 성찰하며 “이제 상생·공생·공존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2월 촬영한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역병이 창궐해 전 세계를 뒤덮은 지 1년. 세상이 바뀌었고, 우리의 삶은 달라졌다. 공포와 불안과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미증유의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87) 전 문화부 장관에게 물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단단했다.

글로벌·선진화·디지털화의 역설 #선진국일수록 빨리 퍼져 큰 피해 #거리두기 탓 ‘호저의 딜레마’도 #러시안룰렛 같은 일상 생활 #생명의 가치는 곧 자유의 가치 #‘나 살고 너 살자’만이 해답 #상대적으로 피해 적은 한국 #상생 원리 알아 마스크 열심히 써 #남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덕

코로나19로 보낸 지난 1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요.
“한국인들은 누구에게서도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코로나의 역설’이라 부르겠습니다. 네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선 글로벌의 역설입니다. 전 세계가 촘촘하게 이어졌고 누구나 어디로든 갈 수 있었죠. 그런데 그 때문에 코로나19가 비행기의 속도로 퍼졌습니다. 하나의 질병이 동시에 전 세계에서 발병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입니다. 그 결과 봉쇄가, 로컬화가 시작됐죠. 두 번째는 선진화의 역설입니다. 자유의 가치, 인권의 가치가 높은 나라일수록 피해가 더 컸죠. 그러다 보니 정부가 자유나 인권을 제한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희구하는 것은 자유와 인권, 글로벌인데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추구하면 곤란해지는 세상이 된 것이죠.”
여태껏 세상을 지탱해온 논리가 뒤집어지고 있군요.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호저의 딜레마입니다. 호저는 고슴도치처럼 몸에 뾰족한 가시가 있습니다. 추우면 짐승들은 함께 모여 온기를 나누는데, 호저는 찔리니까 서로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혼자는 춥고, 모이면 아프고. 인간도 마찬가지죠. 혼자 있고 싶어하지만, 외로우니까 또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보편화 되면서 억지로 혼자 있게 된 사람은 더욱 외로워지고, 억지로 같이 있게 된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됐습니다.”

물음표가 씨앗, 느낌표가 꽃인 인생

우울증이 심해지는 ‘코로나 블루’, 홧병이 생기는 ‘코로나 레드’로 인해 가정불화와 이혼도 늘고 있다죠. 마지막 네 번째는 또 어떤 건가요.
“디지털의 역설입니다. 디지털을 만능으로 알던 사람들은 ‘아, 디지털만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지요. 온라인 수업만 하면서 학교에 못 가게 되니 오히려 선생님의 지도, 친구들과의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지털은 ‘접속’하는 것이고 아날로그는 ‘접촉’하는 것인데, 이 둘은 같이 가야 하거든요. 이것이 바로 제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디지로그’입니다.”
이 네 가지 역설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혹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강력한 군대가 있어도 코로나를 이길 수 있나요. TV 속보를 통해 죽음을 매일 매일 실감하는 가운데 ‘오늘은 안 걸렸구나’하고 안도하는, 러시안룰렛이 일상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생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는 것이 가장 귀중한 교훈이겠죠. 앞만 보고 달려오던 삶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에게 이토록 소중한 생명을 주신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의 원천적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또 그동안에는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갔는데, 그런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자유와 생명은 같은 뜻입니다. 자유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죠. 그래서 생명의 가치는 곧 자유의 가치입니다.”
일찍이 ‘생명이 자본’이라고 강조했던 말씀이 코로나 시국에서 역설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네요.
“코로나는 언젠가는 갑니다. 이 수난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흥하는 국가와 쇠하는 국가가 갈리게 됩니다. 경주에서도 코너워크 할 때 순위가 바뀌죠. 우리를 포함한 모든 국가는 산업화, 정보화에 이어 코로나라는 코너를 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직진 코스를 달렸기에 레이스에 큰 차이가 없었죠. 이 코너를 돌고 나면 이제 생명화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한 테제가 되는 세상입니다. 앞으로 반생명적인 것들은 절대 발을 붙일 수가 없어요.”
‘생명화 시대’의 특징은 어떤 건가요.
“생명은 서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상생하고 공생하고 공존하지요. 인간이 동굴에 살 때부터 박쥐와 같이 살았다는 사실은 전염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연구하는 데 있어 흥미로운 테마입니다. 사실 바이러스도 인간과 공생해 왔어요.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인간에게 달려든 것이죠.”
‘같이 산다’는 말이 왠지 짠하게 느껴지는데요.
“마스크를 예로 들어 볼까요. 마스크는 내가 걸리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옮기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언제든 피해를 볼 수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걸렸다고 하면 쉽게 그를 욕하고 그가 속한 집단을 매도합니다. 흔한 말로 갑질하는 것이죠. 그런데 누군가에게 갑인 사람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을이 되지 않나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나 살고 너 죽자’(이기주의)나 ‘나 죽고 너 살자’(이타주의), ‘나 죽고 너 죽자’(물귀신)가 아닌 ‘나 살고 너 살자’(상호주의)만이 코로나 시국을 벗어날 수 있는 해답입니다. 인류는 포식에서 기생, 기생에서 상생의 ‘자리행 이타행(自利行 利他行)’의 단계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마스크는 삶의 일부가 돼 버렸죠. 마스크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게 됐으니 말입니다.
“자, 마스크를 꼭 정부가 쓰라고 하니까 쓰는 걸까요. 벌금을 때리니까 쓰는 걸까요. 정부를 위해 방역하는 게 아닙니다. 법이 그러니까 쓰는 게 아니라,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것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K방역 성공’의 본질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마스크를 열심히 쓰긴 하죠.
“봉쇄하지 않고 개방했는데도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이 상생의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즉 남을 위해 흘려주는 ‘눈물 한 방울’을 가졌다는 거죠. 한국인의 이런 생명 사상은 위기가 왔을 때마다 발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피니시를 잘 못 해.”

매 순간 마침표 찍어야 새 삶 가능

이어령, 80년 생각

이어령, 80년 생각

그건 왜 그런가요.
“서구에서는 개인이 시시비비를 묻고 따지는 계몽주의를 18세기에 거쳤는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어요. 즉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좀 모자랍니다. 그럼 지속력이 떨어져요. 코로나 사태 한 방에 순식간에 구한말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 남의 생각에 휘둘리기 쉽거든요.”
최근 출간된 회고 인터뷰집 『이어령, 80년 생각』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스스로 생각하라’인데요.
“먼저 말해둘 것은, 그 책을 위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내 자랑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어요. 남이 자기 자랑하는 글을 누가 읽겠어. 다만 ‘나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밖에 없는 내 생각을 내 머리로 풀어내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그것들이 합쳐져 창조적인 집단 지성이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지요. 누구나 ‘온리 원’의 천재로 타고 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인물 탐구론으로 접근해 달라고요.”
그게 어떤 삶이었습니까.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에요.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죠.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
음력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소의 해’를 맞는 느낌을 말씀해 주시지요.
“이 기회에 밝혀둘 것이 있어요. 지금 유튜브에는 내가 2007년 1월 1일자 중앙일보에 쓴 소원 시 ‘날개’가 마치 지금 쓴 것처럼 나돌아 곤란한 인사를 받기도 하고, 또 내가 쓰지 않은 시가 내 이름으로 올라온 것들도 있어요. 모두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닌 덕담이기에 일일이 찾아서 삭제할 수도 없지만, 조금은 난감하지요. 그런가 하면 ‘소가 한 마리면 소원, 두 마리면 투우, 세 마리면 우하하’라는 유머를 적어 연하장을 보내온 독자들도 있습니다. 코로나의 우울 속에서도 웃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려는 내 이웃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보다 마음이 울컥해지더라고. 글 쓰는 사람은 한 줄 쓰고 마침표를 찍어야 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매 순간도 마침표 찍듯 매듭을 지어야 비로소 새 삶을 살 수 있겠지요. 우리 모두 이 코로나 시대를 큰 마침표 하나 찍어 보내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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