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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원 사업을 서기관 혼자?" 北원전 의혹 풀리지 않은 의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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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원전 건설 추진 문건과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달 31일 내놓은 첫 공식입장의 요지는 ▶산업부 내부 검토 자료이며 ▶아이디어 수준에서 종결했고 ▶북한 원전은 비핵화 문제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결론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조원에 이르는 원전 사업을, 그것도 북한을 위해 건설하는 민감한 사안을 상부 지시나 사후보고도 없이 산업부 실무자 차원에서 검토하다 중단했다는 설명은 통상적인 공무 수행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관가에서 나온다.

신희동 산업통상자원부 대변인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북한 원전 건설문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신희동 산업통상자원부 대변인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북한 원전 건설문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신희동 산업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북한 원전 건설 추진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북한 지역뿐 아니라 남한 내 여타 지역을 입지로 검토하거나, 남한 내 지역에서 원전 건설 뒤 북한으로 송전하는 방안을 언급하는 등 그야말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아이디어 차원의 다양한 가능성을 기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보고서에는 ▶북한 함경남도 신포시의 경수로 건설 부지 활용안 ▶비무장지대(DMZ) 부지 활용안 ▶경북 울진의 신한울 3ㆍ4호기 활용을 통한 대북 송전안 등 3가지 시나리오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①탈원전한다며 원전 왜?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안은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북한을 위해서는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취지라 그 자체가 자기모순이라는 지적이다. 같은 원전인데 경주(월성원전)에 있으면 위험하고, 신포에 건설하거나 대북 송전용으로 울진에 짓는 것은 안전하다는 뜻이냐는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공공연히 선언한 국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력 수급 방안 중에서도 굳이 원전을 택해 검토한 배경도 석연치 않다. 신 대변인은 “에너지 분야 협력 차원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사안이기 때문에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에너지 전환 정책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답했지만 기존 원전을 조기 폐쇄하면서 새 원전은 짓는다는 아이디어가 왜 모순이 아닌지 납득하기 쉽지 않다.

②수조원 사업, 靑 보고도 없이 알아서?  

그는 또 청와대나 남북 협력 관련 당국에 보고서를 제출했느냐는 질문에는 “내부 검토 자료로서 종료됐다”고 답했다. 하지만 문건 생성은 2018년 5월, 삭제는 2019년 12월이다. 파일은 김모 서기관의 개인용 컴퓨터가 아니라 산업부 원전산업정책과의 업무용 컴퓨터에 저장돼 있었다. 이미 종료된 아이디어 수준의 자료라면 관련 파일들을 1년 넘게 보안이 필수인 공무용 기기에 보관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1997년 8월 함경남도 금호지구(신포)에서 열리는 대북 경수로 부지공사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한 KEDO 대표단 본진 80여명이 한나라호에 탑승하는 모습. 중앙 포토

1997년 8월 함경남도 금호지구(신포)에서 열리는 대북 경수로 부지공사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한 KEDO 대표단 본진 80여명이 한나라호에 탑승하는 모습. 중앙 포토

게다가 산업부가 설명한 건 ‘북한 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 파일 한 개 뿐이었다. 삭제된 뽀요이스 폴더 내 파일은 총 17개였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근무 경험자, 에너지 남북경협 전문가 명단, 이력서 등도 있었다. 고위 공무원을 지낸 한 인사는 “상부 보고용도 아닌 아이디어 수준의 보고서 치고는 자문한 사람들 명단에 이력서까지, 근거자료가 넘칠 정도로 충분해 보인다”며 “수조원짜리 원전 건설안을 상부의 지시도 없이 서기관이 자발적으로 검토하다 말았다는 것도 통상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③“비핵화 불확실성에 종료” 검토 전엔 몰랐나?  

산업부는 검토 종료 배경에 대해 “북ㆍ미 간 비핵화 상황에 따른 불확실성이 높아 구체적인 추진방안을 도출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이에 대한 외교가의 반응은 “그걸 검토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느냐”로 요약된다. 처음 나온 아이디어도 아니고 1990년대부터 꾸준히 경수로를 대북 인센티브로 검토했다가 북한이 핵무기화를 포기하지 않아 번번이 무산됐는데, 이런 한계를 처음부터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산업부 설명대로 비핵화가 우선이라 원전 건설은 안 되겠다고 결론내렸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비핵화가 이뤄지기 전이라도 북한을 견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원전을 검토했거나 그렇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면 아이디어 차원이라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 작성에 청와대의 지시가 있었는지, 더 나아가 제재나 비확산 규범 등은 무시해도 좋다는 암묵적 분위기 하에 나온 아이디어인지 규명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지난해 4월 한국수력원자력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앞에서 신한울 3·4호기 건설 즉각 재개 등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 중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4월 한국수력원자력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앞에서 신한울 3·4호기 건설 즉각 재개 등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 중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④아이디어에 불과한데 왜 심야 삭제?

 산업부는 문제된 문건들에 대해 '아이디어 차원'으로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아이디어 수준의 통상적인 업무 처리였다면 굳이 이를 심야에 사무실에 들어가 삭제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상식과 어긋난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해당 파일을 포함한 문건들은 일요일 밤 11시(2019년 12월 1일)부터 자정을 넘겨 다음날 1시 20분까지 삭제됐다. 산업부는 “문건 삭제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유감”이라면서도 “다만 산업부 차원의 개입은 아니며 수사와 재판을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밝혔다. 왜 삭제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납득시키지 못했다.

'북한 원전' 해소되지 않은 의문

 각종 의문은 문제의 보고서를 공개하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산업부는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자료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문건과 관련해 산업부 공무원들이 받는 혐의는 감사원법 위반 등이지 '북한 원전 문서 작성' 혐의가 아니다. '북원추'는 애초부터 감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때문에 일각에선 북한 원전 보고서를 통해 오히려 원전의 경제성과 한국 기술의 우월성 등이 입증돼 역으로 월성 원전 폐기 결정의 부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까 봐 공개하기가 부담스러운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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