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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새해 결심을 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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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그는 새해 결심을 하지 않는다. 새해 결심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으로 봐서, 결심이란 걸 아예 안 하는 사람은 아니다. 작심삼일의 패배감을 일생 동안 맛보았기 때문일까? 새해 결심을 하기 위해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산과 바다로 달려가는 무리에 대한 냉소 때문일까? 도대체 왜 그는 새해라는 선명한 분기점에서 애써 태연해지려고 하는가? 아드레날린이 뿜어내는 희망으로 모두가 들떠 있을 때, 그는 왜 특별한 날이 아닌 것처럼 행동할까?

새해 결심에 은밀한 부작용 있어 #지난해의 실수에 셀프 면죄부 줘 #마음가짐보다 행동을 결심해야

그가 새해 결심을 안 하기로 한 이유는 새해 결심이 주는 부작용 때문이다. 새해부터 잘하자는 결심과 새해부터 잘하면 된다는 위안을 핑계 삼아 12월의 남은 며칠을 쉽게 보내버리는 부작용. 마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를 외치며 오늘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처럼, 새해 결심은 늘 12월의 남은 날을 대충 살아도 되는 날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공돈’이라는 이름이 붙은 돈을 쉽게 써버리듯, 12월의 끝자락에 ‘공날’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쉽게 흘려보내는 부작용이 있음을 알아버린 것이다.

‘부자는 돈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현자는 시간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의 새로운 좌우명이 되었다. 새해 결심을 하지 않는 그는 1월 1일에도 평소처럼 아침 산책으로 하루를 연다. 새해 결심을 하는 그의 친구는 전날 늦게까지 새해맞이 의식을 치르느라 새해 첫날부터 늦잠을 잔다. 새해 결심을 하지 않는 그는 12월 31일 밤에도 평소처럼 책을 읽지만, 새해 결심을 하는 그의 친구는 새해 결심 리스트를 만드느라 밤을 새운다.

그가 깨달은 더 심각한 부작용이 또 있었다. 작심삼일의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새해 결심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새해 결심이 지난해에 저지른 과오와 나태를 반성도, 처벌도 없이 용서해주는 셀프 면죄부로 작동한다는 점을 통렬하게 깨달았다. 마치 이런저런 정상을 참작해 형량을 깎아주는 재판장처럼, 새해 결심을 굳건히 한 점을 참작하여 자신에게 사면을 행사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자기의 제국’은 군주 국가와 같다. ‘자기’라는 존재가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 삶의 계획을 짜는 이도 자기 자신이요, 그 계획을 실행하는 자도 자기 자신이고, 그 계획을 어겼을 때 스스로를 정죄하는 자도 자기 자신이다. 결심(決心) 공판의 재판장이 자기 자신이다 보니, 결심한 것에 대한 실패는 온갖 이유로 정상 참작이 된다. 늘 무죄일 수밖에 없다. 마치 자기가 출제하고 자기가 채점하는 시험처럼 애초부터 비정상적인 결심 공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옳다. 그것은 철학적으로도 옳고, 행복 측면에서도 옳다. 그러나 삶의 제국이 오직 자기라는 군주가 지배하는 곳이라면, 우리는 셀프 사면을 남발하여 성찰도 없고 처벌도 없는 무법의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이정표들을 세우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새해 아침, 새로운 한 주, 새로운 한 달. 이런 때에는 일기장과 플래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헬스장은 다이어트를 결심한 자들로 붐빈다. 연말, 중년, 인생 후반전. 마지막이나 끝을 의미하는 시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를 불러일으켜 선물 구매가 급증한다. 새로운 나잇대로 진입하는 아홉수를 맞이한 사람들은 마라톤을 시작하곤 한다. 자연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효과들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시작에 발맞추어 마음을 다잡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한 철학자의 가르침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살아온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성찰과 결심은 인간만이 지닌 특징이 아니던가.

문제는 새해 결심이 일으키는 부작용들에 있다. 마음의 작동에 예민한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고 일부러 새해 결심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루하루에 대한 결심을 할 뿐이다. 이 중 더 현명한 자들은 결심의 내용을 바꾼다. ‘사람들에게 친절하자’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결심을 하지 않는다. ‘옆자리 김 대리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을 대접한다’와 같은 빼도 박도 못할 결심으로 셀프 사면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해 버린다.

새해가 한참이나 남았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구정이라는 또 하나의 기회가 있지 않은가. 새해 결심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자기중심적 결심에서 타인 중심적 결심으로, 마음에 관한 결심에서 행동에 관한 결심으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매년 무죄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