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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 했다가 뺨 맞은 교사...1년간 42명 '정인이' 잃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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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학대로 숨진 정인이가 사망 전 날 어린이집 폐쇄회로 TV에 담긴 모습. 아이는 담임선생님 품에 계속 안겨있거나 멍하게 홀로 앉아있기만 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캡쳐

지난해 학대로 숨진 정인이가 사망 전 날 어린이집 폐쇄회로 TV에 담긴 모습. 아이는 담임선생님 품에 계속 안겨있거나 멍하게 홀로 앉아있기만 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캡쳐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숨진 정인이 사건으로 여론이 다시 들끓고 있다. 소셜미디어(SNS) 등 온라인에서는 ‘정인아 미안해’라고 쓴 뒤 사진을 게시하는 추모 챌린지가 확산하고 있고, 정치권도 관련 법·제도를 정비하겠다며 움직이고 있다.

학대 두 번 신고되면 즉시 분리한다지만 #'제2의 정인이' 언제라도 나올 수 있어 #학대 아동 3만여명인데, 쉼터는 전국 76곳 #시설·인력 늘리고 원가정 복귀 지원 강화해야

새해에는 제2의 정인이를 막을 수 있을까.
4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정인이를 살릴 기회는 최소 3차례 있었다. 정인이가 사망하기 전 어린이집 교사와 소아과 의사 등이 학대 징후를 발견해 신고했다. 그러나 신고 때마다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결국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신고 시스템이 여러 차례 작동했지만, 경찰 대응에서 구멍이 났다.

박현선 세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학대 대응에 있어 모든 체계가 문제없이 작동하는 게 중요한데 경찰 쪽에서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며 “병원에서 신고하는 경우는 아주 적고, 일단 신고가 됐다면 상태가 심각할 가능성이 크다. 향후 부모에게 소명 기회를 주더라도 일단 아이를 분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학대가 아니라고 판정돼 아이를 가정에 돌려보내더라도 일정 기간 국가가 지정한 의료기관에 아이를 데려와 검진받게 하는 등 모니터링해야 한다”며 “최일선에 있는 현장 경찰에 연령에 따라 아이 몸에서 보기 힘든 상처 모양 등 아동학대 징후를 세세하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동학대는 신고해도 유야무야 처리되는 일이 잦은데 신고 과정에서 신고자의 신원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문제도 벌어진다. 전북 순창에선 지난해 11월 한 공보의가 만4세 아이의 학대 의심 정황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가 신분이 노출돼 해당 부모로부터 위협 전화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공보의는 “당시 아이는 왼쪽 눈 바로 옆이 계란 크기로 부어 왔는데 그렇게 다치는 게 흔치 않아 경찰에 신고했다”며 “그런데 경찰에서 내 신분을 노출하는 바람에 아이 부모로부터 ‘당신이 뭔데 신고했냐’며 병원으로 수차례 항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혐의가 없다고 나왔지만, 이런 일이 있다면 누가 나서서 신고하려 하겠냐”고 말했다.

서울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는 A씨도 몇 년 전 아동학대 의심 신고를 했다가 학부모에게 뺨을 맞았다. 돌보던 아이가 눈에 띄게 피멍이 잦고, 골절까지 입어 학대 의심 신고를 했다. 그러나 부모가 강하게 부인했고, 경찰에서도 별일 아닌 거로 보고 넘겼다. 이후 부모는 어린이집까지 찾아와 “생사람을 잡았다”며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A씨는 “트라우마가 생겨 일을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보육교사는 신고하면 어린이집에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더 꺼리기도 한다.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한 정인 양이 안치된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부모와 함께 묘역을 찾은 한 어린이가 정인 양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한 정인 양이 안치된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부모와 함께 묘역을 찾은 한 어린이가 정인 양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영향 탓인지 신고 의무자의 신고율은 30%가 채 안 되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학대 의심 사례로 신고된 3만838건의 신고자 유형을 살펴봤더니 신고의무자의 신고율은 23%(8836건)에 그쳤다.

두 번 신고 때 강제 분리, 비극 막을까

경찰과 정부는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11월 학대 의심 신고가 두 번 접수되면 아동을 가해자로부터 즉시 분리하는 등 조치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두 번 이상 신고된 아이에게 멍이나 상흔이 있으면 3일간 응급 분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렇게 분리되더라도 이후가 문제다. 일단 아이가 보호될 시설이 부족하고, 원래 가정으로 돌아갔을 때 재학대를 막을 대책이 없어서다. 복지부에 따르면 정부와 지자체가 지정해 위탁 운영하는 학대피해아동쉼터는 전국 76곳이다. 지침상 피해 아동은 6~9개월 정도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곳당 정원이 7명 정도라 지금 상황으로는 전체 500명 조금 넘게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복지부는 예산을 확보해 올해 15곳 늘린다는 계획이지만 그렇다 해도 2019년 학대 아동 수가 3만명을 넘는 것을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마저도 지역 쉼터에선 예산이 부족해 전문심리치료사를 상시 고용할 수 없는 곳도 있다. 가정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가정에 방치되는 아이들은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2019년 한 해 아동학대로 숨진 어린이는 42명이다. 우리는 5년간 160명의 정인이를 학대로 잃었다.

생후 16개월 입양아를 학대해 사망하게 만든 혐의를 받는 엄마 A씨가 지난해 11월 19일 오전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검찰 송치를 위해 호송되고 있다. 뉴스1

생후 16개월 입양아를 학대해 사망하게 만든 혐의를 받는 엄마 A씨가 지난해 11월 19일 오전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검찰 송치를 위해 호송되고 있다. 뉴스1

최영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쉼터는 임시시설로, 잠시 머물다 위탁가정 등으로 가야 하는데 대부분 원가정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며 “시설 보호도 중요하지만, 원가정으로 돌아갈 여건이 되도록 관련 지원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 쉼터에서 나와 위탁가정이나 중장기 보호시설로 옮겨갈 수 있는 연계 시스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선진국에서는 학대 발견보다 사후관리 쪽에 예산을 더 많이 쓴다”며 “학대 이후 형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가정을 방문해 아이와 부모가 어떻게 지내는지 등을 밀착 관찰하는 식으로 사후 관리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입양 가족에 대한 사후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장화정 아동권리보장원 아동보호본부장은 “현재 최소 2회의 가정조사를 포함해 입양 후 초기 1년간 네 차례 살피게 돼 있는데 방문횟수를 늘려야 한다”며 “가정에 가서도 구체적으로 뭘 봐야 할지와 관련해 객관적인 평가지표를 만들어 대상 인력에 교육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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