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염재호 칼럼

남아있는 나날과 앞으로의 길

중앙일보

입력 2020.12.3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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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20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한 해를 마칠 즈음엔 그해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게 된다. 새해 다짐한 일들은 잘 이루어졌는지, 나 자신을 괴롭히며 무리하게 산 것은 아닌지, 삶의 깊이를 고민하기보다 바쁜 현실에 매몰된 것은 아닌지, 내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적은 없는지. 보람보다는 후회가 앞서는 것이 연말의 일상이다.

황혼기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
미래의 꿈보다 빚만 남겨준 형국
독선과 아집은 민주주의의 독버섯
대통령은 민주주의 앞길 고민해야

연말처럼 인생의 황혼이 다가오면 자기 삶을 반추하고 남아있는 나날을 생각하게 된다.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작가 이시구로 카즈오의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대저택의 노집사가 살아온 날들을 회고하며 앞으로 남은 날들을 생각하는 모습이 담담히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 노집사 스티븐스는 젊은 날 잃어버린 사랑을 안타까워 하지만 이에 집착하지 않고 품격있게 남은 날들을 맞는다. 인생의 황혼기에 노욕을 부리는 삶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남아있는 나날에 주어진 삶의 의미를 관조하며 인생을 정리하는 것이 현명한 삶의 자세이다.

문재인 정부도 새해가 되면 황혼기에 접어들게 된다. 마치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노년이 되는 것처럼 대통령의 레임덕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며 남아있는 나날을 고민할 때가 왔다.

문재인 정부가 그동안 한 일을 돌아보면 적폐청산, 사법개혁, 그리고 코로나 대응이 대부분이다. 일자리 창출, 부동산 문제 해결, 평화통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등 포부는 대단했지만 지금 황혼기를 앞둔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긍정적으로 미래를 만들기보다는 부정적으로 과거를 무너뜨리는데 몰두했다. 다음 세대에게도 미래의 꿈보다는 빚만 남겨주는 형국이 되었다. 지나온 시간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투쟁으로 점철된 영욕의 날들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으로 보면 치열하게는 살았지만 허탈한 황혼을 맞게 된 것이다.

인생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은 돌이켜보면 찌들은 삶이 된다.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삶보다 자유로운 삶이 더 아름답다. 정치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는 자유로운 삶의 가치와 같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면 민주화가 진전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많은 진보 지식인들은 이 정부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평가한다.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고 절차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대립하지만 결국은 타협과 양보를 통해 적절한 차선을 이끌어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참모습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귀납적인 논리체계를 갖고 있다. 나는 절대 옳고 너는 절대 틀리다는 사전적 선악의 논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절대선만 믿고 이를 반드시 달성하려는 연역적 접근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종교적 신념에 가깝다. 칼 포퍼는 이를 두고 ‘열린사회의 적’이라고 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오만한 독선이다. 민주주의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일방적 다수결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대의정치는 민주주의의 참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유신독재 시대에 유정회를 앞세워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다수결의 논리로 무리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유신의 목적만이 국가를 위한 절대선이라고 국민을 몰아붙인 유신시대에 우리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구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독선은 금기이다. 우리가 소수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국민의힘뿐 아니라 정의당, 국민의당, 시대전환과 같은 소수당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가며 설득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참된 민주주의이다.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은 왜 전국의 교수들이 신조어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하고 2위로 ‘후안무치(厚顔無恥)’를 뽑았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판단이 올해를 휩쓴 현상이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명언처럼 독선과 아집은 민주주의의 독버섯으로 자라게 된다. 다수 국민이 원한다는 주장은 독선에 취한 착각의 유혹이다.

내가 잘못 산 삶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기보다는 무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아름답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여당의 중진 도종환 시인은 남아있는 날들에 되새길 만 한 시구를 쓴 적이 있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제 1년여의 기간이 남았다. 인생의 황혼길에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듯 문재인 대통령도 새해 첫날 자신의 취임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남아있는 나날과 앞으로의 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여당의 전 대표는 앞으로 20년 집권의 길을 얘기했지만, 대통령은 앞으로 20년 민주주의의 갈 길을 고민했으면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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