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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 도난 1년…전주 '익명 천사' 올해도 22번째 성금 내놨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삼마교회 인근에 7000만원 두고 사라져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29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7012만898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사진 전주시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29일 노송동주민센터 인근 삼마교회 뒤편에 두고 간 성금. A4 용지 상자 안에는 현금 7000만원과 12만8980원이 든 돼지저금통,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라고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진 전주시

"지난해 저로 인한 소동이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이겨내실 거라 믿습니다."

오전 11시24분 노송동주민센터에 전화 #2000년부터 21년간 7억3863만원 기부 #지난해엔 2인조 절도범 성금 훔치기도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29일 노송동주민센터에 두고 간 성금 상자에 담긴 편지에 적은 글이다. 그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2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주민센터에 익명으로 6억원이 넘는 성금을 기부해 온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지난해 이맘때 그가 두고 간 성금 6000여만원을 2인조 절도범이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얼굴 없는 천사'는 선행을 멈추지 않았다.

 29일 전주시에 따르면 '얼굴 없는 천사'는 이날 오전 11시24분쯤 노송동주민센터 인근 삼마교회 뒤편에 7012만8980원이 담긴 성금 상자를 두고 사라졌다. 주민센터에 "삼마교회 뒤편에 A4 박스를 뒀다"고 전화를 건 뒤였다. 그가 두고 간 A4 용지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4묶음과 동전 12만8980원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이날 '얼굴 없는 천사'의 전화를 받은 송병섭 노송동주민센터 주무관은 "'주민센터 근처 삼마교회 '얼굴 없는 천사' 간판 옆 골목길에 A4 박스를 두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분들께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전화를 건 시점과 내용·목소리 등을 볼 때 전화한 남성을 '얼굴 없는 천사'로 보고 있다. 이름·직업 등 모든 게 베일에 싸인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노송동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지는 익명의 기부자다. 2000년부터 올해까지 21년간 모두 22차례에 걸쳐 총 7억3863만3150원을 기부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경찰에 붙잡힌 2인조 중 1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경찰에 붙잡힌 2인조 중 1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전주에서는 지난해 말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이 사라져 발칵 뒤집혔다. 충남 논산과 공주 지역 선·후배인 A씨(36)와 B씨(35)는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10시7분쯤 '얼굴 없는 천사'가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두고 간 성금 6016만3510원을 상자째 차량에 싣고 도주한 혐의(특수절도)로 기소됐다.

 법원은 A씨 등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보다 무거운 형량을 선고했다. 전주지법 형사1부(부장 강동원)는 지난 6월 A씨와 B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8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과 징역 1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익명의 기부자는 매년 사회적 약자와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많은 돈을 주민센터 앞에 몰래 놓곤 했다"며 "그러나 피고인들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고귀한 돈을 사전에 계획해 훔쳐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밝혔다.

 A씨 등은 범행 당일 5시간도 안 돼 각각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붙잡혔다. "이틀 전부터 주민센터 근처에서 못 보던 차가 있어서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는 노송동 한 부부가 건넨 메모가 결정적 단서가 됐다. 경찰이 회수한 A4용지 상자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2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 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있었다.

지난 1월 2일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16만351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2일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16만351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전주시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상자를 지키기 위해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에 1500만원을 들여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했다. 차량 번호판까지 인식할 수 있는 첨단 방범 카메라다. 전주 완산경찰서와 CCTV 관제센터는 전주시 요청에 따라 주민센터 인근 순찰과 감시 활동을 강화했다. 그간 신분 노출을 꺼리는 '얼굴 없는 천사'를 배려해 CCTV를 달지 않았지만, 지난해 '성금 도난 사건' 이후 그의 기부금이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전주시는 전했다.

 전주시에 따르면 그동안 '얼굴 없는 천사'가 건넨 성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생활이 어려운 5575세대에게 현금과 연탄·쌀 등으로 전달됐다. 앞서 노송동 주민들은 '얼굴 없는 천사'의 뜻을 기리고 그의 선행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천사(1004)를 연상케 하는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지정했다. 또 주변 6개 동이 함께 '천사축제'를 열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20년간 이어져 온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전국에 익명의 기부자가 늘게 하는 이른바 '천사 효과'를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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