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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2020년에서 전화가 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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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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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시간여행, 아니 과거와의 전화통화가 가능하다면 어떨까. 한 해가 저무는 지금, 미래의 어느 순간에 2020년의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는 상상을 해본다. 과연 뭐부터 알려줘야 할까. 국내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다시 연말에 매우 심각해질 거라는 경고? 제약회사 중에 화이자가 미국 대선 직후 가장 먼저 백신을 내놓을 거란 정보? 이런 경고와 정보를 어떻게든 고위 당국자에게 전달하라는 당부? 상대가 아는 사람이라면, 선심 쓰는 셈 치고 다음 주 로또 당첨번호? 아니면 로또 못지않게 인생역전 혹은 인생좌절의 계기가 될지 모르니, 영혼을 끌어모아서라도 부동산과 주식을 사라는 조언?

이런 하릴없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영화 ‘콜’을 보며 으스스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였다. 과거와 현재가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는 이 영화의 설정만 들으면, 2000년대 초 인기를 누린 몇몇 판타지 멜로 영화가 떠오른다. 김하늘·유지태 주연의 ‘동감’에선 동호회 무선통신을 통해서, 전지현·이정재 주연의 ‘시월애’에선 신축 주택의 우체통을 통해서 주인공들이 각기 다른 시간대에 사는, 서로 존재조차 몰랐던 상대와 점차 애틋하고 친밀한 교감을 나눴다.

영화 ‘콜’에서 전종서가 연기한 영숙. [사진 넷플릭스]

영화 ‘콜’에서 전종서가 연기한 영숙. [사진 넷플릭스]

하지만 ‘콜’에서 20년 세월을 사이에 두고 같은 집에 살면서 우연히 집 전화로 소통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지독한 악연이 되어 버린다. 2019년의 서연(박신혜)은 1999년의 영숙(전종서) 덕분에 비극적 과거를 한 차례 바꾸는 데 성공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자신의 힘을 확인한 영숙은 서연을 옭아매고 이용하면서 악행으로 치닫는다.

시간여행의 고전이 된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과거를 바꾸려는, 아니 개입하려는 시도가 뜻밖의 결과를 낳는다는 걸 알려줬다. 주인공 마티(마이클 J 폭스)는 나중에 자신의 부모가 되는 젊은이들의 연애를 도우려다 엉뚱한 상황을 초래하고, 자신의 존재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는 일종의 해프닝에 그쳤지만, ‘콜’의 서연이 겪는 상황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잔혹한 짓을 무심하게 해치우는 영숙은 한국영화 악녀 계보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만하다. 영숙은 섬뜩하고, 이를 소화한 배우 전종서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아마도 극장에서 봤더라면 더 무서웠을 텐데, 코로나19의 여파로 이 영화도 극장 개봉 대신 지난달말 넷플릭스로 공개하게 된 경우다. 그러고 보니 여러 해 공들인 영화를 거리두기가 한창일 때 개봉했던 어느 제작자가, 그보다 더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을 겪은 아는 얼굴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2020년의 이들과 통화를 하게 된다한들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할 지 막막해진다. 2020년은 살아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해였다고, 그런 한 해를 견뎌낸 당신은 대단하다고 해야할까. 실은 2020년의 ‘나’에게 해주고픈 얘기다.

이후남 문화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