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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프리즘] 정치가 시를 만났을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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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호 31면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정치와 예술은 예전부터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었다. 밀고 당기는,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관계였다. 가령 1970~80년대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무도한 권력에 치열하게 맞섰다. 반면 정치인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인·소설가를 언제나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요즘 한국과 미국의 정치 한복판에서 주목받는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란히 시(詩)를 ‘동원’하는 현상은 그래서 새삼스럽지 않다.

추미애·바이든 정치인의 시 인용 #정치적 목적 평면적 활용 가능성

시의 언어를 달리 공감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나 아닌 남의 처지를 살펴 아픈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의 언어 말이다. 그렇다면 시와 정치가 만나는 게 이상할 건 없다. 정치의 언어도 공감을 추구해야 한다. 유권자들의 공감을 자아내 지지세력을 이끌어내고 이들의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끌고 가는 과정이 정치 아니겠나.

그래서 정치인들의 시 인용 혹은 동원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시의 정치적 인용 과정에서 아무래도 시의 본질(그런 게 있다면)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시를 사랑하는 한국의 정치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다. 적어도 최근에는 그렇다. 검찰총장을 상대로 ‘사상 초유’라는 표현이 따라붙는 상황을 여러 차례 연출하며 싸움을 벌이는 그는 최근 페이스북에 잇따라 서정시를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며 자신의 심경을 대변했다. 첫 번째는 일제 치하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의 ‘절정’, 두 번째인 16일에는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었다. 그런데 ‘절정’은 몰라도 ‘산산조각’의 인용은 좀 이상했던 것 같다. 최근 시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비채)에 실려 다시 주목받게 된 듯하지만 원래는 2005년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에 실렸던 작품이다. 룸비니에서 구입한 귀한 흙부처를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났다. 아까워하는 순간 부처님의 깨달음이 찾아온다. 시의 마지막 4행이 핵심이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깨지고 부서져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존재론적인 의지가 느껴진다. ‘나’라는 존재 자체의 실체를 부정하는 좀 더 근본적인 불교철학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추 장관은 가령 ‘산산조각이 나도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식으로, 목적론적으로 읽은 것 같다. 그렇다면 편의적 인용의 소지가 있다. 서정시를 속담처럼, 지혜가 담긴 말처럼 납작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미국 정치인은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 아일랜드계인 그는 아일랜드의 노벨상 수상 시인 셰이머스 히니(1939~2013) 애호가로 우리에게도 알려져 있다. 특히 히니의 ‘트로이의 치유(The Cure at Troy)’는 아예 선거 캠페인 영상에도 활용했다. 바이든의 매력적인 쉰 목소리에 실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시의 메시지는 강렬하다. “인간은 고통받기 마련이다(Human beings suffer)…하지만(But)…오랫동안 기다렸던 정의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고 희망과 역사가 호응할 것이다(The longed for tidal wave/ Of justice can rise up/ And hope and history rhyme).” 이렇게 발췌해 놓으니 감흥이 덜한 듯한데 전문을 찾아 읽어 보시길. 갈가리 찢긴 현재 미국 사회에 딱 들어맞는 치유와 화해의 문장들이다. 그런데 생전 히니는 자신의 시가 정치적으로 읽히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이든의 시 인용 역시 납작한 활용의 소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립을 부르는 추 장관과 다르긴 하지만.

이렇게 놓고 보면 시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 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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