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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모·발표불안…작가도 출판사도 "나도 그래" 책이 나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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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호 10면

작가는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서 국사 교과서를 읽었다. 말이 꼬였다. 유주영 작가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고, 이후로 발표 장애를 겪었다”고 말했다. 유 작가는 20년 가까이 사람 모인 곳을 피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는 “차라리 커밍아웃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며 “정작 내 아픔을 얘기하고 보니, 나를 옭아맨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고 털어놨다.

코로나 시대, 책의 재발견 #한달 원고 300부 중 하나만 책으로 #"개성, 사회적 의미는 기본 밑받침"

유주영 작가는 발표불안을 극복하고 스피치 강사로 거듭났다. 그는 청년정신 출판사에 원고를 냈는데, 그 출판사의 양근모 대표도 발표불안을 겪고 있었다. [사진=유주영]

유주영 작가는 발표불안을 극복하고 스피치 강사로 거듭났다. 그는 청년정신 출판사에 원고를 냈는데, 그 출판사의 양근모 대표도 발표불안을 겪고 있었다. [사진=유주영]

유주영 작가의 '나는 이렇게 발표불안 탈출했다'를 출간한 양근모 청년정신사 대표. 그는 유주영 작가가 앓은 발표불안을 겪고 있다. [사진=양근모]

유주영 작가의 '나는 이렇게 발표불안 탈출했다'를 출간한 양근모 청년정신사 대표. 그는 유주영 작가가 앓은 발표불안을 겪고 있다. [사진=양근모]

출판사 대표는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홀로 ‘반달’을 불렀다. 양근모(57) 청년정신사 대표는 “시쳇말로 삑사리가 났다”고 했다. 수상 소감이 무서워 상을 거부할 정도의 발표 장애를 앓게 됐다. 출판사를 차린 뒤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사회자인 유명 소설가는 질문만 던지고 허리가 아프다며 일어나 딴짓을 했다. 양 대표는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렸단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대본도 없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끝냈는지 하도 정신이 없어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지난 4월 유 작가의 원고를 받은 양 대표는 무릎을 탁 쳤다. 이심전심, 동병상련. 발표 장애를 극복하고 스피치 강사로 나선 유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원고가 책으로 나왔다. 제목은 『나는 이렇게 발표불안을 탈출했다』. 한 달 들어오는 300여 개의 원고 중 하나. 출간이라는 햇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월별 도서 판매 보니.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월별 도서 판매 보니.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 코로나19 속 책 판매 7.3% 늘어
2020년. 책이 떴다. 출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도 호황을 맞은 업종 중 하나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에 따라 외출을 자제하면서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까지 책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3% 증가했다.

도서 얼마나 발행했나.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도서 얼마나 발행했나.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쓰기도 읽기를 따라갔다. 출판유통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발행 도서는 2018년 6만5000여 건에서 2019년 6만7000여 건으로 늘었다. 올해도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전망된다. 양근모 대표는 “기존 작가 외에도 일반인들도 투고를 많이 한다”며 “재테크·그림·운동법·성장기 등 나만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밝혔다. 작가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까지, 그 뒤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필명 부운주 작가는 전신탈모증을 앓고 있다. 탈모증으로 고생하던 동녘출판사의 편집자는 그의 이야기에 공감해 책을 내자고 했다. 이미지는 부 작가의 책 '머리카락의 기쁨과 슬픔'에 쓰인 자신의 삽화. [그림=동녘출판사]

필명 부운주 작가는 전신탈모증을 앓고 있다. 탈모증으로 고생하던 동녘출판사의 편집자는 그의 이야기에 공감해 책을 내자고 했다. 이미지는 부 작가의 책 '머리카락의 기쁨과 슬픔'에 쓰인 자신의 삽화. [그림=동녘출판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부운주(27·필명) 작가는 10년째 전신탈모증을 앓고 있다. 출판사 수십 곳에 원고를 보냈지만, 번번이 퇴짜였다. 글을 다시 다듬었다. 출판사 여러 곳의 문을 또 두드렸다. 도서출판 동녘의 구형민(42) 편집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책 냅시다.” 구 편집자는 10여 년 전 1000만 탈모인(대한탈모치료학회 통계)의 일원이었다.

구 편집자는 “지금은 상태가 호전됐지만, 당시 탈모는 내게 공포와 충격이었다”며 “전신탈모의 아픔을 겪는 부 작가의 글에 공감이 갔다”고 말했다. 부 작가의 『머리카락의 기쁨과 슬픔』은 픽션이다. 욕실을 ‘머리카락의 공동묘지’로, 탈모 순간을 ‘마우스로 드래그해서 delete 키로 누른 것 같았다’로 표현하는 등 곳곳에 재치 있는 문장이 보인다. 재미를 선사한다는 깊이만큼 페이소스도 큰 폭으로 진동한다.

한효정(61) 푸른향기 출판사 대표는 트레킹 매니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두 차례 갔다. 그녀는 “길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했다. 2013년 암 수술 뒤 걷기는 그녀에게 병을 이길 가장 탄탄한 방법이었다. 시인이자 작가인 한 대표는 스스로 책을 냈다. 『지금 여기, 산티아고』다. 그리고 걷는 사람들을 눈여겨봤다.

트레킹 매니어인 한효정 푸른향기 출판사 대표에게 '발탁'된 김강은 작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이야기를 『아홉수, 까미노』로 펴냈다. 한 대표도 이미 『지금 여기, 산티아고』를 집필했다. 김현동 기자

트레킹 매니어인 한효정 푸른향기 출판사 대표에게 '발탁'된 김강은 작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이야기를 『아홉수, 까미노』로 펴냈다. 한 대표도 이미 『지금 여기, 산티아고』를 집필했다. 김현동 기자

『행복해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이하늘), 『함께, 히말라야』(문승영), 『아홉수, 까미노』(김강은) 등을 잇달아 냈다. 한 대표는 “이 작가는 결혼식 대신 남편과 세계여행을, 문 작가는 여성으로서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에서 가장 어려운 트레킹을, 김 작가는 길 위의 그림이라는 ‘어반 스케치’를 테마로 삼아 독특하게 전개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고 말했다. 이번 달에는 코로나19로 인한 남극 탈출기를 그린 또 다른 '길 이야기'를 낸다. 한 사진작가가 아내와 함께 18일간의 사투 끝에 귀국하는 『남극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책이다.

한효정 푸른향기 출판사 대표는 트레킹 매니어로, 걷기 관련한 원고를 눈여겨 본다. 사진은 프랑스에서 트레킹 중 한 장면. [사진=한효정]

한효정 푸른향기 출판사 대표는 트레킹 매니어로, 걷기 관련한 원고를 눈여겨 본다. 사진은 프랑스에서 트레킹 중 한 장면. [사진=한효정]

# 인세·종이 놓고 작가-출판사 협상
‘이념적’ 성향도 맞아야 한다. 바다출판사는 지난 5월 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을 냈다. 김인호 대표는 “셔머의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우리 출판사의 지향성과 내 개인의 지향점”이라고 말했다. 이 출판사의 나희영 편집장은 “과학과 인문, 문학·예술에서 합리적 교양을 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바다출판사는 잡지 ‘스켑틱(SKEPTIC)’을 발행하고 있다. 1992년 미국에서 창간돼 회의적으로 현대 사회를 진단하는 교양 과학 잡지다.

출간 결정이 나면 작가와 출판사가 '네고(협상)'에 들어간다. 인세·디자인·교열·편집은 물론 제본 과정에서 어떤 종이를 쓰느냐를 놓고도 밀당이 벌어지는 것이다. 출판사와 코드가 맞는다고 무조건 원고가 채택되는 것은 아니다. 한효정 대표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같은 길 이야기라도 ‘개성’이 없으면 사실 눈길이 가지 않는다”며 책 출간 이유를 말했다.

구형민 편집자는 “우리나라 전신탈모증 환자가 2만 명에 달하고 이들의 아픔을 보듬어야 할 ‘사회적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다. 양근모 대표도 “발표 장애 혹은 발표 불안은 말 그대로 말 못할 괴로움”이라며 “드러난, 혹은 숨어있는 수십·수백만의 그런 분들에게 책의 존재 이유인 ‘공감과 치유’를 선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개성, 사회적 의미와 가치, 공감과 치유 등 책이 갖춰야 할 기본 소스가 글에 버무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신인'이다. 수십 곳 투고한 끝에 책을 낼 수 있었다. 이들은 사전에 해당 출판사의 ‘성향’을 몰랐다고 한다. 인연을 맺은 건 우연이었다. 그 인연은 '기본'이라는 밑받침을 통해 출간이라는 빛을 끌어들였다. 12월은 책이 가장 많이 팔리는 달. 책의 재발견이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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