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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첫 타자 김기현 "대한민국은 문주공화국"…秋는 독서 삼매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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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9일 밤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이날 김 의원은 토론은 오후 9시에 시작돼, 정기국회가 끝난 자정에 자동 종료됐다. 뉴스1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9일 밤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이날 김 의원은 토론은 오후 9시에 시작돼, 정기국회가 끝난 자정에 자동 종료됐다. 뉴스1

“저는 이 순간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이렇게 읊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문(文)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문님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문빠들로부터 나온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9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filibusterㆍ무제한 토론)의 첫 주자로 나서 한 발언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 ‘변호인’에서 언급돼 더 유명해진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인용해, 문재인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이날 3시간 동안 토론을 이어간 김 의원은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 중 한 명이다. 청와대 개입 의혹이 불거진 바로 그 선거에서 낙선했다. 국민의힘은 “야당의 비토(vetoㆍ거부)권을 없애는 공수처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공수처가 출범하면, 청와대가 연루된 선거개입 의혹과 같은 사건은 절대 수사가 진행될 수 없다. 모두 공수처 캐비닛 속에 묻힐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김 의원을 내세운 이유다.

김 의원은 발언대에 올라 “공수처는 권력자를 위한 비리은폐처가 되고, 권력옹호처가 될 것”이라며 “권력자가 되면 (누구나) 공수처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저는 여당일 때도 반대했다. 우리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공수처는 탄생해선 안 되는 괴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 삶을 통해 직접 체험한 사람이라서,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그런 걱정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서다.

이날 더불어민주당은 100여건의 법안을 하루 만에 통과시켰다. 이날 자정 김 의원의 필리버스터가 자동 종료되면 10일 임시국회를 소집해 공수처법 개정안을 처리하고, 각각의 필리버스터가 종료되는 대로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과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국가정보원법 개정안 등의 쟁점법안도 일방 처리할 계획이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9일 공수처법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같은 당 권성동 의원이 두번째 토론자로 나설 예정이었지만, 김 의원이 자정까지 3시간을 모두 채우면서 권 의원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합뉴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9일 공수처법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같은 당 권성동 의원이 두번째 토론자로 나설 예정이었지만, 김 의원이 자정까지 3시간을 모두 채우면서 권 의원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합뉴스

여당의 이 같은 ‘법안 밀어붙이기’에 대해 김 의원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생산적인 국회를 하라는 게 국민의 요구인데, 주권자 국민이 개나 돼지 취급을 받고 법치가 사라졌다”며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데 집권자들은 법을 이용한 지배로 생각하고 있다. 가장 사악한 형태의 인치주의”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의 취임 이후를 겨냥한 경고성 발언도 했다. “막무가내로 야당을 무시하고 깔아뭉개고 군사 작전하듯 군홧발로 밟고 지나가다가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된다. 이 나라에 더는 불행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아야 하는데 국민이 요즘 대통령 안위를 걱정한다”면서다.

김 의원은 이날 필리버스터를 위해 약 10시간 토론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의 원고를 준비했다. 목 보호 스프레이와 안약을 챙기고, 만일의 경우 생리현상 해결을 위해 기저귀까지 찼다. 그러나 토론은 3시간만 진행됐다. 회의가 지연돼 오후 9시에야 필리버스터가 시작됐고, 국회법에 따라 회기가 끝나는 자정에 김 의원의 토론도 자동 종료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란 제목의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다. 이날 본회의에서 공수처법에 대한 무제한 토론에 나선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발언 도중 추 장관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연합뉴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란 제목의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다. 이날 본회의에서 공수처법에 대한 무제한 토론에 나선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발언 도중 추 장관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연합뉴스

준비한 자료에 비해 토론 시간이 짧았던 만큼 김 의원은 쉬지 않고 발언을 이어갔다. 목소리는 대체로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톤을 유지했지만, 윤석열 검찰총장의 징계 논란을 언급하며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비판할 때는 목소리가 한층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앞 회의장에 앉아 있던 추 장관은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저자는 검사 출신인 이연주 변호사로, 검사가 된 지 약 1년 만에 사표를 내며 당시 경험에 관해 쓴 책이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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