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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형 대입제도 고쳐야 나라 먹여살릴 인재 쏟아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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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국서도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나오려면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바야흐로 입시의 계절이다. 지난 3일 수능에 이어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대학별 면접, 논술고사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대입 준비로 초등학생 시절부터 밤낮없이 고생해 온 청소년들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심정일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시험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반복 암기한 지식 중 절반 이상이 사회에 나가 쓸모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대학입시에 성공한 학생들조차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 찾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4당5락 입시제도’로 고도성장 달성 #지식 더 많이 외우면 평생 보상 받아 #기술 발달로 암기 지식 가치 낮아져 #대학이 나서 창조형 인재 선발해야

현대 경제성장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대학 입시는 한 나라의 경제가 고도성장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인프라다. 1980년대 말 시카고대 로버트 루카스 교수에 의해 탄생한 내생적 성장이론에 따르면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한마디로 인적자본이다. 근로자의 머릿속에 체화된 지식이나 기술인 인적자본이 교육 등을 통해 빠르게 축적되면 경제성장이 빨라지지만, 인적자본 축적이 정체되면 성장이 하락한다는 사실을 루카스 교수와 동료 경제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인적자본이 활발히 축적돼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대입제도에 크게 의존한다. 우리나라에서 1960년 이후 30년은 선진 지식을 외워서 이용하는 ‘모방형 인적자본’의 가치가 매우 높아 이에 대한 투자가 최적인 시기였다. 우리나라는 ‘토너먼트식 모방형 입시’, 즉 누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암기했는지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지식을 암기한 학생들을 선발해 일생에 걸친 보상을 해주는 입시제도를 채택했다. 이에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암기하고자 하는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져, 4시간 자고 공부하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4당 5락’이란 말까지 유행했다. 이렇게 모든 학생이 최대한으로 지식 암기에 시간 투자를 하게 됨에 따라, 나라 전체의 모방형 인적자본 총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그 결과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방형 입시제도의 폐해 극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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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모방형 인적자본’의 가치는 급속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여러 산업에 걸쳐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특허로 보호받는 선진기술을 모방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인터넷 및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굳이 사람들 머릿속에 암기를 통해 지식을 넣어 저장해 둘 필요가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급격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만들어내는 능력인 ‘창조형 인적자본’으로 성장의 엔진을 교체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대학입시제도도 근본적 변혁을 이루었어야 했다.

그러나 내신이건 수능이건 지식 암기 중심의 시대착오적인 모방형 입시체제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2013년 수능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유럽연합(EU) 중 어느 지역의 국내총생산(GDP)이 큰지”를 묻는 문제가 출제됐다. 모방형 입시가 얼마나 무의미한 지식 암기를 요구하는지의 예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발표한 최초 정답은 EU가 더 크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이후 NAFTA의 GDP가 더 커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다. 학생들에게는 이 문제를 맞혔는지 틀렸는지로 합격·불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지만, 정작 당시 필자가 물어본 어떤 경제학자도 알고 있지 않은 지식이었다. 알 필요가 없는 지식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현재의 모방형 입시제도는 변별력을 위해 이런 쓸모없는 지식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도록 강요하고 있다.

창조형 인재 얼마든지 객관적 평가 가능

지금이라도 대학입시를 기존의 모방형 인적자본 측정 위주가 아니라 창의력 평가 위주로 선발하는 ‘창조형 대학입시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는 대학이 창조형 인적자본을 가장 중요한 선발기준으로 채택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을 초중고 시절부터 열심히 키우게 돼, 빌 게이츠·스티브 잡스·마크 저커버그 같은 창의적 인재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

대입에서 중시되어야 할 능력

대입에서 중시되어야 할 능력

이를 위해 창의적인 각계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 입시에서 창의력 평가 방법을 확립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대학별 면접 혹은 필답고사에서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를 제시하고 학생이 얼마나 창의적인 답을 제시했는지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경제 과목에서는 “일 년 내내 섭씨 30도가 넘는 불나라에서 얼음을 화폐로 사용하는 방법은?”“그동안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창의적인 금융상품을 하나 제시하시오” 같은 문제를 출제하고, 다른 학생들과 얼마나 다른 참신한 답안을 제시했는지로 평가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초중고 시절 생각해낸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등록하는 ‘학생 아이디어 등록제’ 시스템을 도입하고 대학이 이를 평가자료로 사용하는 방안도 도입할 수 있다. 물론 창조형 대입제도 하에서도 모방형 인적자본을 평가하지만 이를 자격 고사화해 핵심 지식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수준에서만 평가하고, 평가의 중심은 창의성 평가에 두어야 한다.

학생이 제시한 답안이나 아이디어의 창의성을 평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평가의 주관성 문제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이 이미 존재한다. 학생의 창의성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평가하는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 평가와 전문가 평가를 이용하면 객관적인 평가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상호주관적 평가를 위해서는 많은 평가 전문인력이 필요해 고용 비용도 필요하다.

여기에 필요 재원은 정부가 교육 예산으로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 정부가 교육예산 73조원 가운데 1000분의 1만 지출해도 상호주관적 평가에 필요한 평가인력을 전국 모든 대학에 공급할 수 있다.

대학입시는 초중고 교육의 방향타다. 서울대를 포함한 대학들이 나서서 창의력을 가장 중요한 선발기준으로 사용한다고 선언만 해도 대한민국 초중고 교육은 창조적 인재를 키우는 교육으로 크게 탈바꿈할 수 있다.

사교육 해결하고 교육 불평등까지 해결하는 강력한 해법

창의력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대입제도가 확립되면 현재 GDP의 1%가 넘는 연간 21조원 규모의 사교육 시장이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그동안 사교육이 커지게 된 이유는 기존의 모방형 입시제도로 인해 ‘규모의 경제’가 성립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타강사가 수능이나 내신에 나올 확률이 높은 문제들을 족집게처럼 찍어서 그 답과 풀이방법을 가르쳐주는 강의 영상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이를 수요하는 수많은 학생에게 추가적 비용 없이 복제 판매하여 막대한 수강료 수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입에서 열린 문제를 내고 창의성을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면 사교육은 더 이상 ‘규모의 경제’를 향유하기 어렵다. 일단 사교육 선생님이 학생들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라는 보장이 없다. 더해서 스타강사가 대입에 나올 열린 문제를 미리 족집게처럼 찍어 창의적 답안을 생각해 냈다고 해도 똑같은 답안을 여러 학생에게 동시에 판매하기가 어렵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기본적으로 남과 달라야 하기 때문에, 평가자들은 서로 비슷한 답안들에 대해서는 창의성을 낮게 평가한다.

결국 대학입시에서 창의적 답안으로 평가받으려면 다른 학생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 답안이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학생에게 동시에 복제 판매되는 답안은 학생들이 찾지 않게 된다. 창의적인 답안을 판매해도 한 학생에게만 판매할 수밖에 없는 ‘규모의 비경제’가 발생하여 수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사교육 강사의 입장에서도 더는 학생을 가르치고 있을 이유가 없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를 상품화한 자신의 회사를 만들어 훨씬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창조형 입시제도의 도입은 한국 교육의 고질적 문제인 사교육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교육 불평등 문제까지 해결하는 강력한 해법이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