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라던 MB정부보다 더해"…SOC 유혹에 무릎 꿇은 정부

중앙일보

입력 2020.12.05 08:00

업데이트 2020.12.05 08:44

“SOC(사회간접자본) 사업, 부동산을 통한 경기 부양의 유혹을 느껴도 참고 있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SOC 예산은 정부안 대비 5000억원 늘어난 26조5000억원이 됐다. 뉴스1

박병석 국회의장이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SOC 예산은 정부안 대비 5000억원 늘어난 26조5000억원이 됐다. 뉴스1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주도한 장하성 주중 한국대사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았던 지난 2018년 8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도 결국 SOC 경기 부양 유혹에 무릎을 꿇은 모양새다. 내년도 SOC 예산이 사상 최대 규모로 짜이면서다.

고용 부진에 정치권의 고질적인 ‘쪽지예산’이 어우러지며 SOC 씀씀이를 다시 키웠다. 게다가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예타) 조사를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향후 SOC 예산이 더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내년 SOC 예산 26.5조…박근혜 정부 뛰어넘은 사상 최대 

5일 국회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내년도 SOC 예산은 26조5000억원으로 확정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26조1000억원)을 뛰어넘어 가장 많다. 정부는 올해 23조2000억원인 SOC 예산을 26조원으로 대폭 늘렸는데, 국회가 5000억원 더 얹었다. 전년 대비 14.2% 늘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와 대비된다. 현 정부가 예산을 편성한 첫해인 2018년엔 SOC 예산(19조원)을 전년 대비 14.1%나 확 낮췄었다.

연도별 SOC 예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연도별 SOC 예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정부와 정치권이 도로 ‘SOC 경기 부양’에 나선 이유가 있다. 먼저 부진한 일자리 상황이다. 올해 3분기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2.1%를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올 1·2분기 연속 뒷걸음질 치다가 반등했다.

반면 고용 부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올해 10월 취업자 수는 1년 전보다 42만1000명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설업의 고용 창출 효과를 정부가 외면하기 어렵다. 한국산업연구원 산업통계분석시스템에 따르면 건설 부문 고용유발계수는 2018년 기준 8.47이다. 고용유발계수는 관련 생산을 10억원 늘릴 때 추가 고용 가능 인력을 수치로 보여준다. 제조업 평균은 4.68이다.

코로나19 같은 외부 충격이 없었음에도 극심한 고용 부진을 겪은 2018년에 정부가 ‘생활 SOC 확충 방안’이라는 이름의 건설 부양책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회의원의 지역구 챙기기도 SOC 예산 증가에 한몫했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늘어난 SOC 예산의 상당수는 ‘쪽지 예산’이다. 여야가 따로 없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인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역구인 양주시 숲길체험프로그램 사업에 1억원을, 양주시 내행 하수관로 사업에 3억5000만원을 새로 편성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대구 수성갑의 매호1지구 재해위험지역정비 사업 예산을 11억4200만원 증액해 24억1900만원으로 늘렸다.

실세들의 예산, 국회 심의과정서 얼마나 늘었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실세들의 예산, 국회 심의과정서 얼마나 늘었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예타 무력화 우려…“원조 토건 MB정부 보다 더 나갔다”

SOC 예산은 향후 더 불어날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 정치권이 예비타당성 조사(예타) 요건 완화를 추진하고 있어서다. 노웅래 민주당 의원은 예타 실시 기준을 총 사업비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완화하는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냈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예타 면제 규모를 전 정부보다 늘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현 정부의 예타 면제사업 규모는 88조1000억원에 이른다. 이명박 정부(60조 3000억원), 박근혜 정부(23조 6000억원)를 훌쩍 뛰어넘는다. 여기에 가덕도 신공항 건설도 예타가 면제되면 문재인 정부의 예타 면제 사업 규모가 100조원에 이를 수 있다. 민주당은 가덕도 신공항에 대한 면제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예타의 세금 낭비 방어막 역할이 무뎌질 거란 우려가 나온다. 경실련은 “국책사업은 수조원이 투입돼 한번 시작하면 잘못된 사업이라도 되돌리기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 정부를 향해 “적폐라고 일갈했던 원조 토건 이명박 정부보다 더 나갔다”고 비판했다.

지난 2019년 정부가 발표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대상 사업.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지난 2019년 정부가 발표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대상 사업.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토건 의존 경기부양 벗어나야” 

적정 규모의 SOC 재정 투입은 필요하지만, 민간의 투자와 고용을 유도하지 못하면 나랏돈만 낭비하는 결과를 낳을 거란 지적이 나온다.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경기가 위축된 상황에서 정부의 SOC 투자는 일정 부분 필요하다”면서도 “투자와 고용의 주체는 민간이 돼야 하는데 현 정부는 지나치게 재정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표 교수는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덜 쓰면서 민간 투자를 활성화하는 규제 완화, 기술 혁신 유도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토건 위주의 경기 부양책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목소리도 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선거를 앞두고 정치공학적 논리에 따라 SOC예산이 늘어나고 예타도 사실상 무력화되는 분위기”라며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발전 등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현실에서 토건 사업에 의존하는 경기 부양책은 효과가 크지 않고 혈세만 낭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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