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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녀 수차례 찌르고 "만취 심신미약"···50대 발뺌 안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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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뉴스1]

[연합뉴스·뉴스1]

2014년 A씨는 동네에서 술을 마시다가 여성 B씨를 알게 됐다. 2017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이듬해 1월 A씨는 벌금 수배자로 경찰에 체포됐다. 유치장에 입감된 그는 근무자에게 “담배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화를 내며 유치장 안에 설치된 세면대를 손으로 뜯어내 바닥에 던져 버렸다. 법원은 “실형 및 집행유예 전과를 비롯해 수차례의 폭력 전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범행을 반복했다”며 A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년여가 흐른 2019년 10월 7일 B씨가 갑자기 사라졌다. A씨는 집을 나간 B씨가 이웃 남성과 함께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해당 남성의 집에 찾아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A씨는 격분했다. 그해 10월 11일 오후부터 밤까지 술을 마신 그는 집에서 야구방망이와 식칼을 챙겨 다시 이웃집을 찾았다. 출입문을 부수고 집에 들어간 A씨는 도망치는 동거녀와 이웃 남성에게 칼을 휘둘렀다. 이웃 남성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고, B씨 역시 치료 일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결장 손상을 입었다.

A씨의 범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현행범으로 체포돼 유치장에 갇히자 근무자에게 또다시 “담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A씨는 이번에는 유치장 안에 설치된 대변기 커버를 손으로 뜯어낸 후 바닥에 던졌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술에 만취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심신미약의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경찰에서는 “당시 약간 취기가 올라온 정도였다”고 말한 것과 달라진 진술이었다. 1심 재판부는 “야구방망이와 식칼을 미리 준비해 피해자의 집에 찾아갔고, 도망가는 피해자들을 쫓아가 식칼로 수회 찌른 점으로 비추어 보면 당시 술에 취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유족과 동거녀가 정신적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됐고, 이들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A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A씨는 다시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A씨가 과거에도 술에 취해 다른 범행을 저지른 전력을 감안하면 술에 취한 상태를 유리한 정상으로 보기 어렵다”며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 역시 “심신장애에 관한 주장을 배척한 원심의 잘못이 없다”고 판단해 A씨는 징역 20년형이 확정됐다.

‘PC방 살인 사건’ 이후 바뀐 심신미약 조항

음주 상태였다며 심신미약이 인정된 대표적 사례는 조두순 사건이다. 조씨는 2008년 12월 8살 초등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했고, 법원은 그의 나이가 많고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이유로 징역 12년형을 선고해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일었다. 이후 PC방 알바생이 손님을 살해한 이른바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심신미약 감경을 시도하자 국민적 공분이 일었다. 2018년 법제처는 “심신장애로 인해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는 형법 조항을 “형을 감경할 수 있다”는 문구로 변경했다. 법관의 재량에 따라 감경 적용을 할 수 있도록 바뀐 것이다.

최근에는 심신미약을 인정하는 기준 또한 높아져 정신감정 등을 통한 전문가의 진단이 있어야 감경이 이루어지는 추세다.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른 뒤 흉기로 주민 5명을 숨지게 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안인득 사건이 대표적이다. 1심은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하지 않아 사형을 선고했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은 안씨가 조현병 장애를 갖고 있었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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