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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니스트의 눈

“윤석열의 승리가 아니라 추미애의 패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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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검찰총장 찍어내기와 검사들 집단성명

윤석열 검찰총장을 30년 넘게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검찰 고위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윤 총장의 각오는 분명하다.” 윤 총장은 대검 대변인을 통해서도 “위법·부당한 처분에 끝까지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친정부 검사들이 그의 가족을 건드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임되면 퇴직금과 피선거권 제한, 공직 재임용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만도 아니다. 윤 총장 개인적 입장에서 지금 주저앉으면 27년의 검사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그가 신념처럼 믿어온 법치주의가 파괴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설사 해임이 결정되더라도 징계 처분 무효확인을 요구하는 행정소송까지 불사한다는 분위기다.

부당한 처분에 윤 총장 끝장 대응 #검사들도 법치 파괴에 집단행동 #두 사람 운명은 징계·소송보다 #여론조사 지지율에 좌우될 수도

“법 정신 실종” … 검사들의 내부 증언

지난 주말 큰 변곡점을 맞았다. 최대 현안인 판사 성향 문건에 대한 내부 고발이 꼬리를 물었다. 이 문건 작성자인 성상욱 검사는 “어느 누구도 작성 책임자인 저에게 해명을 요구하거나 문의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물의 야기 법관’ 리스트를 담당한 단성한 부장검사도 “나나 우리 팀에 해명을 요구하거나 질문을 했어야 마땅한데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했다. 감사팀에서 양심선언 한 이정화 검사 역시 “판사 사찰 문건의 작성 경위를 알고 있는 분과 처음으로 접촉을 시도한 직후 갑작스럽게 총장님에 대한 직무집행 정지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혔다.

이 진술들의 공통분모는 행위자에 대한 확인도 없이 검찰총장의 직무정지와 징계청구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증거로 불법사찰을 단정했는지 궁금하다”고 묻는다. 이런 반문이 검사들에게 더 울림이 컸다. 법률가인 검사들은 절차적 정당성을 생명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사나 징계는 본인에게 먼저 통보하고 소명 기회를 주는 게 법 정신이다. 흉악범이 도망가도 본인 소명을 들을 때까지 기소 중지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판사 성향 문건은 순서가 거꾸로다. 명백한 증거 확보가 우선이고 당사자에게 충분한 소명의 기회도 줘야 한다는 헌법 제12조의 ‘적법절차’가 증발돼 버린 것이다.

왜 검사들이 대거 들고일어났나

변곡점이 된 검사들의 주요 증언들

변곡점이 된 검사들의 주요 증언들

고검장-지검장-부장검사-평검사들이 대거 항의 성명을 낸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유례없는 집단행동이다. 어제는 총장 직무대행인 대검 차장까지 추 장관에게 “한발 물러나 달라”고 요청했다. 항의 성명에는 대검 부장들과 서울중앙지검장 및 차장, 동부·남부지검장 등 극소수만 불참했다. 이들 상당수가 문재인 대통령의 경희대 후배, 추 장관의 한양대 후배, 일부 지역 출신들이다. 코드 인사도 갈 데까지 갔다. 일반 검사들의 켜켜이 쌓인 불만과 분노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법조계는 법무부 검찰국 검사들이 들고일어난 것에 특히 주목한다. 동기 중 최고의 엘리트들이 직속 상관인 추 장관의 일방적 조치에 반발한 것이다. 여기에 법무부 기조실장이 사건 관련 서류 결재란에 빠져 있고 윤 총장에 대한 수사 의뢰도 류혁 감찰관의 결재를 받지 않았다. 사실상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의미다. 보통 일이 아니다.

한 전직 검찰총장은 “검사들의 항의 성명은 윤 총장의 승리가 아니라 추 장관의 패배”라고 진단했다. 성명들을 살펴보면 그 핵심은 윤 총장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추 장관의 직무 정지와 징계 청구가 지나친 조치이니 이를 재고해 달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정치적으로 미리 해임을 정해 놓고 인사권·징계권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다 검사들의 저항에 부딪힌 것이다. 검사들 사이에는 앞으로 정권 입맛에 안 맞는 수사를 하면 직무배제,인사 불이익, 징계의 3종 세트를 얻어맞는다는 위기의식이 번질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시나리오 … 민심이 복병

윤 총장 입장에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행정법원에서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고 1일 오전 감찰위원회에서 “부당한 감찰이며 직무 정지 조치는 철회해야 한다”는 권고가 나오는 것이다. 이럴 경우 2일 징계위원회는 큰 부담을 피할 수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징계위원회가 해임을 강행하고 이를 대통령이 곧바로 승인해 버리는 것이다. 이미 민주당에선 “윤 총장은 대역죄인” “징계가 아니라 수사 대상” “(해임을 넘어) 파면하라”는 험악한 표현까지 난무한다. 정면충돌이라는 나쁜 시나리오로 달려가는 조짐이다.

마지막 숨은 변수는 민심이다. 청와대는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중요한 결단들은 국정 지지율 40%가 위협받을 때마다 나왔다. 지난해 10월 14일 국정 지지율이 41%로 내려앉자 조국 법무부 장관을 한 달 만에 자진 사퇴시켰다. 올해 8월 부동산값 폭등으로 지지율 40%가 위협받았을 땐 다주택자 중심으로 청와대 수석들을 대거 물갈이했다. 이번에도 리얼미터 조사가 분수령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정 지지율이 40% 선을 깨고 내려오면 추 장관 퇴진 등 의외의 카드가 나올 수도 있다. 한때 ‘폐족’ 위기까지 경험한 친문 진영은 어느 정부보다 정권 재창출과 퇴임 후 안위를 신경 쓰기 때문이다.

“윤 총장이 정치할 가능성은 반반”

윤 총장과 가까운 검찰 간부들은 “예전에 그가 정치할 확률은 제로였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양정철 민주연구원 원장과 20대 총선을 앞두고 두 차례 만나 정계 입문을 권유받았다. 국정원 댓글 수사로 대구고검에 유배된 시절이었다. 과거 한나라당과 안철수 대표도 그에게 총선 출마를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윤 총장은 “정치에 소질도 없고 정치할 생각도 없다”며 거절했다. 양 원장 측은 “단칼에 거부하는 과정이 매력적이어서 그 후에도 가끔 우연히 자리를 같이했다”고 전했다.

지금은 윤 총장 지인들의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쩌면 정치를 할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했다. 조국 사태 이후 1년 넘게 외압에 시달렸고 이른바 ‘윤석열 사단’이 초토화되는 등 정치가 검찰을 덮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국감장에서도 “퇴임 이후 어떻게 국민에게 봉사할지 생각해 보겠다”는 미묘한 답변을 내놓았다.

윤 총장은 국정원 댓글 사건 이후 주변을 깨끗이 관리해 왔다고 한다. “2010년부터 비싼 양주를 마시거나 골프를 친 적이 없다”고 공언할 정도다. 군 면제 사유였던 부동시(짝눈)도 인사청문회 때 병원을 방문해 진단서를 뗐다고 한다. 이번에 여권이 특활비 등 윤 총장을 무차별로 털었지만 ‘판사 성향 문건’ 외에는 거의 건지지 못했다. 정치 입문에 걸림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윤 총장이 실제 정치에 뛰어들지는 미지수다. 한 검찰 간부는 “이번에 윤 총장이 검사들의 절대적 응원을 받은 게 정치에 뛰어들 경우 발목을 잡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 총장 개인을 넘어 검찰 조직 전체의 문제가 된 것이다. 자칫 검사들의 기대를 뿌리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윤석열 현상은 이미 상수다. 여론조사에서 이낙연 민주당 대표·이재명 경기지사와 함께 3강 체제를 구축한 지 오래다. 보수 야당이 위축된 가운데 그는 폭주하는 문재인 정권에 홀로 맞서는 강한 전사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주호영 국민의 힘 원내대표는 “윤 총장 해임은 추미애라는 칼을 빌린 문 대통령의 차도살인”이라 했다. 하지만 윤 총장이 해임당하면 스토리 라인은 훨씬 선명해지고 더 큰 날개를 달게 된다. 순교자 이미지까지 얻기 때문이다.

그의 몸집이 커지자 김종인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은 “야당 정치인이 아니다”며 견제했다. 윤 총장이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했던 만큼 앙금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유승민 전 의원의 최근 발언이 오히려 돋보인다. “국민의 힘은 울타리를 굉장히 넓게 써야 한다. 안철수 대표·홍준표 의원·오세훈 전 시장·원희룡 지사는 물론 윤 총장까지 이번에는 제일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