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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조사관 80% '번아웃' 경험…"월 초과근무 100시간 넘어"

중앙일보

입력

서울 성북구보건소에 마련된 성북구 코로나19 비상방역대책본부. 뉴스1

서울 성북구보건소에 마련된 성북구 코로나19 비상방역대책본부. 뉴스1

역학조사관 5명 중 4명이 ‘정서적 탈진(번아웃)’을 경험하는 등 감정 소모가 극심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6일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균 교수팀은 지난달 24일부터 지난 7일까지 경기도 역학조사관 20명을 심층 인터뷰 및 설문한 결과, 인터뷰 참여자들의 ‘정서적 고갈’의 평균값은 4.31점으로 16명이 기준 이상의 정서적 탈진 상태를 보였다고 밝혔다. 또 외상후울분장애(PTED) 문항 조사 결과 인터뷰 참여 조사관들의 울분은 평균 2.04점으로 ‘지속하는 울분 상태’를 보였다. 특히 조사관 5명(25%)은 심각한 수준의 울분 상태를 보여 일반인들보다 울분 위험성이 높게 나타났다.

한 조사관은 “4월 말에는 확진자가 나오지 않고 끝날 줄 알았다. (유행이) 또 시작되면서 역학조사를 다시 하게 됐는데, 몸이 굉장히 안 좋았다. 쉬어도 몸이 회복이 안 됐다”며 “전쟁 중에 장수가 철수할 수는 없지 않냐. 여러 가지 이유로 버텨야 하는데 환자들이 죽는 걸 볼 때, 그만두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른 조사관은 “내가 이렇게 해서 과연 뭐가 달라질까, 역학조사를 몸을 상해가면서 하는데 과연 도움이 될까. 경계하고는 있지만 계속 이런 생각이 난다”고 했다. 잘 때마다 역학조사를 하는 꿈을 꾼다거나 3주 연속 근무 후 교통사고가 났다는 조사관도 있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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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조사관들은 대부분 주말과 평일 구분 없이 일하고 있었으며, 퇴근 후에도 지속적인 업무 연락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 초과 근무 시간이 100시간이 넘거나 오전 4~5시에 귀가한 뒤 오전 7시에 다시 업무배치 연락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근무 환경 또한 열악한 것으로 파악됐다. 조사관들은 업무용 휴대전화가 지급되지 않아 개인 전화를 사용하다 보니 조사관의 전화번호가 공개돼 피조사자들이 업무 외 연락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호소했다. 보건소에 관용차량이 없어 개인차량을 쓰면서 유류비나 주차비를 조사관 개인이 부담하기도 했다.

동선을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거짓으로 응답하는 피조사자가 많아지면서 도덕적 갈등과 스트레스를 겪는 조사관들도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 조사관은 “지난여름 집단감염 때 조사를 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며 “확진자들한테 유선으로 질문하는데, 반응이 거의 세 가지였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역학조사에 응하지 않겠다’, ‘양성 판정은 국가에서 조작한 것’이라거나 욕하고 끊거나였다”라고 했다. “사회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의심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호소도 나왔다.

역학조사 과정에서 외부적 압력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 조사관은 “역학조사 도중에 전화가 와서 ‘거기 사람들 많은데 빨리 발표해서 검사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빨리 검사 내달라’ 이런 식으로 연락 오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필요한데, (지자체 등에서) 선제적으로 많이 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재촉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조사관은 “보건소장이나 시의원, 시장님에게 연락이 와 ‘왜 여기는 접촉자 분류 안 했느냐’ ‘여기는 왜 검사 진행하지 않았느냐’ 이런 것들에 개입이 있다”며 “역학조사 지식을 설명해 드리고 접촉자로 분류할 필요가 없었다,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해 드려도 이분들은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대신 표현해주는 분들이다 보니 저의 결정보다 그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고, 제가 설명해 드려도 (검사를 하라고) 결정을 한다”,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된다”고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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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요구를 하거나, 조사관들에게 폭언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한 조사관은 일부 학교 및 교육청 관계자들이 코로나19 검사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조사관은 한 병원장이 코호트 격리에 항의하며 조사관 개인에게 연락해 ‘네가 뭔데 이런 식으로 역학조사를 하냐’ ‘어떻게 책임을 질 거냐’며 폭언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조사관들 다수는 이직을 생각하거나, 공중보건의로서 조사관 근무를 하는 경우 복무기간이 끝나면 역학조사 업무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편 조사관들은 GPS나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통해 접촉자를 분류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확진자들의 동선을 공개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한 조사관은 “누구를 위한 동선 공개인지 잘 모르겠다”며 “역학조사가 끝났고 방역 조치가 끝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 장소가) 제일 안전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걸 굳이 왜 공개하냐. 시민들은 더 불안하게 되고 업장은 동선 공개로 피해를 보게 된다. 행복한 사람이 없다”고 질타했다.

다른 조사관은 “동선을 이렇게 공개할 필요가 없다. (확진자와) 마트에 갔다고 해도 마스크를 썼다면 감염의 우려가 굉장히 낮아지는 상황”이라면서도 “지자체에서는 동선 공개를 많이 하고 싶은 경우가 있다. (선제적인 노력을) 자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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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교수는 “불 끄기 급급한 위기 대응에서 유연하고 장기적인 체제로 전환하려면 무엇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며 ▶조사관을 비롯한 현장 방역 인력의 업무 강도 및 환경 개선 ▶조사관들에 대한 사회적 지지 ▶체계적인 인력 관리를 위한 권한과 자원의 의사결정 구조 정비를 촉구했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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