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끈 530억 담배와의 전쟁···"흡연·폐암 인과관계 부족" 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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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서울역 광장에서 한 시민이 한 손에 마스크를 들고 담배를 피고 있다. [뉴스1]

9일 서울역 광장에서 한 시민이 한 손에 마스크를 들고 담배를 피고 있다. [뉴스1]

6년을 끌어온 ‘담배 소송’ 1심이 건강보험공단의 완패로 결론 났다.

법원, "공단은 직접적인 손해배상 청구권 없어" #구상권 검토 위해 보험자들 청구권 따져도 "인정 안 돼" 결론 #2014년 시작된 건보공단-담배회사 손배소 6년만에 공단 1심 패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재판장 홍기찬)는 20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수입ㆍ제조ㆍ판매업자인 주식회사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주식회사, 브리티쉬아메리칸토바코코리아(BAT 코리아) 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번 소송의 어떤 청구도 인정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먼저 ▶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과 ▶이 소송과 관련한 흡연자들을 대신해 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 모두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흡연자 폐암 등으로 533억 들어…담배회사에 소송”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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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건보공단은 담배의 결함과 담배회사의 불법행위로 3465명의 흡연자가 폐암 등에 걸렸고, 공단은 이들에게 보험급여로 533억여원을 지출했다고 주장했다. 건보공단이 533억여원의 지출을 한 건 담배회사들의 불법행위 때문이니 이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법원은 공단이 담배회사에 직접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는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공단이 지불한 533억원은 공단이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내야 할 돈을 낸 것일 뿐”이라고 했다. 공단이 보험급여를 내는 건 거둬들인 건강보험금을 쓰는 것에 불과하다는 취지다. 여기서 어떤 재산상 불이익이 있었다면 그건 당초 공단이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지 공단이 이익을 침해당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갖게 되는 건 아니라는 취지다. 법원은 “공단이 구상권을 행사해 비용을 회수할 여지가 있을 뿐 직접 피해자로 손해배상을 구할 권리는 없다”고 판결했다.

흡연자 대신해서 공단이 구상권 청구한다면?

그럼 폐암 등을 얻은 흡연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한 공단이 이들을 대신해 담배회사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는 있는 걸까. 국민건강보험법 제58조 제1항은 “제3자의 행위로 가입자에게 보험급여를 한 경우 공단은 제3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정했다. 재판부가 언급한 구상권은 이 조항에 근거한다.

하지만 법원은 결과적으로 이 구상권도 인정되기 어렵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구상권이 인정되려면 직접 피해를 본 ‘가입자(흡연자)'들의 담배회사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먼저 인정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법원은 가입자의 손해배상 청구권 인정 여부를 따져 보기 위해 크게 두 가지를 주로 판단했다. 먼저 ▶담배에 설계상ㆍ표시상 결함이 있는지와 ▶담배와 가입자들의 질병 간 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다.

인체에 유해하다고 알려진 니코틴이나 타르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나 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채용하지 않은 담배는 설계상 결함이 있는 걸까. 재판부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법원 “담배 설계ㆍ담뱃갑 표시 등에 결함 인정 안 돼”

흡연은 담뱃잎을 태워 연기를 흡입하는 것이 본질이다. 이때 담배 연기에 포함된 니코틴과 타르의 양에 따라 담배의 맛이 달라지는데 이는 소비자들의 기호 선택으로 이어진다. 담배 소비자들은 ‘안정감’ 같은 니코틴의 효과를 기대하며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 회사가 니코틴을 제거한 담배를 만들어 이런 효과를 만들 수는 없다. 또 흡연자가 중독되지 않는 수준의 적정 니코틴 수준 설정도 쉽지 않다. 이런 점을 종합할 때 재판부는 “니코틴이나 타르를 완전히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는데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담배에 설계상 결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결했다.

2018년 교체된 담뱃갑 경고그림. [뉴스1]

2018년 교체된 담뱃갑 경고그림. [뉴스1]

흡연이 소비자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점은 표시상 결함이 없다는 판단 근거가 됐다. 현행법에 따라 담배회사들은 담뱃갑에 경고 문구나 청소년 판매 금지 문구를 표시한다. 또 그간의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담배가 인체에 유해하고, 한번 시작하면 쉽게 끊기 어렵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재판부는 “담배 제조자가 법률에 따라 경고 문구를 표시하는 것 외에 추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담배에 표시상 결함이 인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결했다.

재판부 "폐암 등 질병-흡연 간 인과관계 증명 안 돼" 

김용익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흡연 소송에서 패소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김용익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흡연 소송에서 패소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폐암 등 가입자들이 걸린 질병과 흡연과의 인과관계 역시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흡연 이외에도 개개인의 생활습관 및 유전, 직업적 특성, 대기오염 등 다양한 요인들이 폐암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도 폐암에 걸린 사례가 발견되는 점 등을 보면 법원은 담배와 폐암 등 질병이 원인과 결과 관계로 명확히 대응하는 질환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만약 이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려면 이들이 흡연에 노출된 시기와 정도, 발병 시기, 흡연 이전의 건강상태, 생활습관, 가족력 등 다른 증거가 추가로 증명돼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결국 공단이 이번 소송에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인과관계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게 법원 판단이다. 공단은 법원에 이 사건 가입자들이 20년 이상의 흡연력을 갖고 있고 폐암 등의 질병을 진단받았다는 사실관계를 제출했다.

 판결 직후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은 법원에서 취재진에게 “대단히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판결”이라며 “담배의 명백한 피해에 대해 법률적 인정을 받으려 했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항소 문제를 포함해 담배 피해를 밝혀나가고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