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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왜 하필 ‘항공 준국유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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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1999년 5월 아시아나항공은 러시아 모스크바행 코드 원(대통령 전용 특별기)을 띄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98년 일본 방문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스크바는 아시아나의 미취항지다. 의전을 매끄럽게 하려면 취항 중인 항공사를 택하는 게 상식이다.

복수 민항으로 항공산업 급성장 #경쟁 속에 혁신 DNA가 자란 덕 #반독점 대신 독점 택한 역주행은 #시장·정책, 동반 실패 초래 위험

‘DJ가 아시아나가 호남기업이라서 챙긴다’는 루머가 돌았다. 비자금을 실어나르기에 아시아나의 콤비(여객과 화물기 합체형) 항공기가 적당해서 활용한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호사가의 입방정일 뿐이다. 당시 대한항공은 97년 괌 추락 사고 이후 대형 사고가 잇달았다. 오죽하면 미국 국무부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 대한항공 이용 자제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청와대가 아시아나를 코드 원으로 택한 배경이다. 복수 민항이어서 가능한 선택지였다.

복수 민항은 경쟁을 촉발했다. 애초 덩치 싸움은 가당치 않았다. 서비스 경쟁에 불이 붙었다. 아시아나 기내에 마술쇼가 등장하고, 94년엔 항공사 최초로 전 노선 금연을 실시했다. 당시 최고 항공사로 꼽히던 싱가포르항공이 벤치마킹을 선언할 정도로 혁신의 연속이었다. 아시아나가 2007년부터 14년째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5성급 항공사로 우뚝 선 배경이다. 독점에 젖어 꼬장꼬장하기만 하던 대한항공도 미소(Smile), 친절(Sincerity), 안전(Security) 이른바 3S를 내세우며 혁신의 배에 올라탔다.

이런 항공사가 사라진다. 그것도 경제나 정책 논리가 아니라 오로지 돈, 즉 금융 논리에 의해서다. 이 과정에서 국토교통부는 주무(務)부처가 아니라 주무(無)부처로 전락했다. 하기야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가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던 부산 신공항 문제와 관련해서도 국토부는 마찬가지 신세다.

서소문포럼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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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의 경영난은 금호그룹 탓이 컸다. 대우건설, 대한통운 등 무리한 인수합병(M&A)에 아시아나가 돈 줄 역할을 하며 경영이 악화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덮쳤다. 그래도 뼈를 깎는 자구 노력 덕에 더디지만 조금씩 아시아나에 피가 돌았다. 2분기에 110억원, 3분기에 58억원의 흑자를 냈다. 4분기에는 화물 성수기가 겹쳐 더 좋은 실적이 기대된다. 코로나19 백신 공급이 임박하면서 전 세계 항공사 주식이 급등하고 있는 판이다. 이 와중에 대한항공과의 합병이 발표됐다. 익명을 요구한 경영학자는 “법정관리로 가면 구조조정은 있겠지만 복수 민항체제를 유지하며 회생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인데 굳이 정책을 뒤집으며 합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대한항공도 부실기업인데…”라고 했다.

32년 이어온 복수 민항 정책을 뒤엎은 까닭을 국민은 알지 못한다. 경영난에 처한 항공사에 대한 지원을 비난할 사람은 없다. 모든 국가가 국적 항공사를 살리려 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정부 방침은 국유화에 가깝다.

국유화를 택한 나라가 없는 건 아니다. 독일이 그렇다. 12조6000억원을 투입해 루프트한자의 지분 20%를 확보했다. 정부가 최대 주주가 됐다. 비판이 거셌다. 독일 정부가 묘수를 냈다. 경영을 정상화한 뒤 2023년까지 지분을 모두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3년간 한시적 국유화다. 말이 정부가 최대 주주이지 실제로는 루프트한자가 회생하도록 3년 동안 지원하겠다는 의미다. 경영 자율권을 보장한 건 물론이다.

우리 방식은 엉뚱하다 못해 시대착오적이란 비판마저 나온다. 산업은행이 8000억원을 투입해 한진칼 지분 10.66%를 확보한다. 국민연금의 2.9%를 합치면 범정부 지분이 13.56%다. 경영권 분쟁 중인 조현아 측 지분을 빼면 정부가 사실상 2대 주주가 된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도 8.11% 보유 중이다.

이처럼 많은 지분을 가지면서 경영권을 언제 돌려줄 것인지에 대한 말이 없다. 대신 ‘경영을 감시·통제한다’는 합의 조항에다 “오너일가 철저 감시”라는 공언도 했다. 이참에 경영 개입을 공식화하는 인상이다. 대한항공 간부는 “사실상 정부의 손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경영권 분쟁이 가라앉지 않은 회사다. 그런 회사가 독점기업이 된다. 정부로선 틀어쥐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반독점은 선진국의 척도다. 독점에 제동이 걸릴 때마다 혁신이 싹을 틔운다. 아시아나가 탄생한 뒤 혁신의 DNA가 퍼진 것도 그런 맥락이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병합은 그 반대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항공 사회주의”라고 했다. “시장의 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더 무섭다는 조지 스티글러(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말이 맴돈다”고도 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