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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당원 뒤에 숨어 ‘무공천’ 약속 파기한 이낙연 대표의 꼼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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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민주당이 결국 ‘중대한 잘못으로 재·보선을 하는 경우 무공천한다’는 당헌을 고쳐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 공천을 강행키로 했다. 정파적 이익을 위한 정치공학적 계산만 있을 뿐 국민적 공감대나 정당성이 없는데도 국민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듯 파기한 것이다. 이게 입만 열면 ‘20년 집권’을 외쳐온 집권당의 본모습이라니 그 위선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공천’ 조항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2015년, 조국 교수 등이 주도한 당 혁신위원회가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조문화했다. 당시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전임 군수의 선거법 위반으로 치르게 된 경남 고성군수 재선거에서 민주당은 ‘책임정치’ 운운하며 새누리당에 ‘후보를 내지 말라’고 몰아붙였다.

이번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박원순·오거돈 등 민주당 소속 전직 시장들의 성범죄 사건으로 인한 것이다. 선거법 위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 범죄다. 검경이 벌써 몇 달째 수사를 질질 끌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들은 2, 3차 가해의 고통 속에 숨죽이고 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중하게 여기는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후보 무공천은 물론, 국민과 피해자들 앞에 석고대죄해야 마땅할 사안이다.

그런데 이낙연 대표 등 지도부는 전 당원 투표라는 걸 방패막이 삼아 무공천 조항을 백지화했다. 말 바꾸기를 위해 당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비겁한 행위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민주당은 전 당원 투표 찬성률(86.4%)을 근거로 “당원들이 당헌 개정에 뜻을 모아주셨다”(이낙연 대표)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원 투표율이 26.4%에 그쳐 당헌·당규상의 유효투표 기준(3분의 1 이상)에 미달하는 것으로 드러나자 “정치적 의사를 묻는 과정이었다”며 또 말을 바꿨다. 신동근 최고위원은 “선거 자체는 정당의 꽃이고 존립 근거이자 존재 이유”라며 “국민도 이미 시장 후보를 여야가 다 낼 거라고 알고 계신다. (민주당이) 결단해서 바로 현실화시킨 것일 뿐”이라며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과 궤변·꼼수로 일관하고 있는 민주당이 이러고도 공당이라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유력한 차기 주자로 꼽히는 이 대표가 무공천 번복 과정에서 보인 독단적인 당 운영과 친문 패권세력에 의존하는 모습은 실망스럽다. 그는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도덕적이고 유능한 후보를 찾아 세우겠다”고 했지만, 이미 무너져내린 도덕성 앞에 책임회피를 위한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